'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의 첫 문장은 주인공 뫼르소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준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해변에서 만난 직장 옛 동료 마리와 데이트를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본다. 마리의 청혼에는 사랑하지는 않지만 결혼은 할 수 있다고 답한다. 친구 레몽의 부탁에도 진위여부를 떠나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의 증인이 되기로 결정한다. 회사 사장의 파리 지사 파견 제안에는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라고 하며 거절한다.
이렇듯 그는 주변의 모든 일에 대해 보편적인 관습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해변의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설은 크게 이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는 뫼르소의 일상들에 대해 묘사했다면, 후반부에서는 법정에서 살인혐의로 체포된 뫼르소에 대한 재판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 재판은 아주 부조리하게 흘러간다. '왜 살인을 저질렀는가' 보다는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바로 다음날 여자와 코미디 영화를 봤는지' 등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그의 일상을 심판하며 보편적인 관습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해버린다.
사형을 기다리는 그를 설교하려는 사제에게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울분을 토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실존주의'가 압축적으로,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드러난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즉, '인간에게는 '실존'이외의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無'로 태어나 오로지 그 자신의 선택만을 통해 인생을 채워가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참 어려운 책이었다. '실존주의'에 대해서 찾아보고 공부해봤지만 이해하기 벅찬 내용들이 많았다.
그나마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해 보자면, 나는 '실존주의'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 제기하는 불신과 의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존주의와 뫼르소를 100%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우리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고, 질서와 공생을 위해 인류적 차원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 따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이성'과 그것을 토대로 형성된 '관습'을 맹신하다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비극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실존주의와 같은)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항상 '왜?'라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사회가 제대로 된 방향을 가고 있는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보편적인 가치들이 정말 옳은 것들인지, 이 사회가 개인의 선택과 존재는 무시하고 단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