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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Mar 18. 2017

만만치 않은 회사생활, 살길은 내가 찾아야..

서서히 적응해 가는 서울생활

LG소프트로 이동을 했더니 이건 뭐, 완전히 군대조직 같은 거다. 인사는 총무부의 한 파트였는데 대리 두 사람, 사원 한 사람으로 구성된 작은 조직이었다. 총무파트는 차장님이 맡고 계셨고, 그 전체 총괄을 부장님이 하셨고, 그 위에는 이사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디테일에 강하신지 별명이 "김대리"였다. 큰 의사결정보다는 늘 작은 것을 문제 삼으셨고. 특히 퇴근을 늦게 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셨다. 문제는 당신이 퇴근하기 전에 퇴근을 하면 찍힌다는 거.

9시 이전에 퇴근을 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고. 일이 있던 없던 회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계열사로 이동하자마자 과장으로 승진을 했다. 그리고 이동한 지 몇 개월만에 인사파트 전체를 책임지는 리더가 되었다. 지금까지 평가만 받다가 타인을 평가하는 위치가 되고 보니 리더라는 자리가 참 어려운 자리임을 느끼게 되었다. 회사 이동과 함께 이사도 했다. 구로구 개봉동의 다가구 셋집을 떠나 신림동의 빌라로 조금 더 서울의 중심으로 이사를 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데 부동산 소장님이 이러면서 웃는다. "요즘 다 잘리는데, 능력이 좋은 가봐요" 그래, 내가 서울까지 왔는데 잘리면 말이 안 되지.


사실 서울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가져보려고 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보석세공사였다. 왜 그 직업에 관심이 있었는지 지금은 이해조차 되지 않지만 매일 밤 여의도공원을 내려다보았던 상황이라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나 싶다. 고민을 털어놓는 나를 대신해서 엄마가 사촌오빠를 통해 강남 압구정의 보석가게 주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줬다. 인터폰을 통해 사람을 확인하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정말로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하찮게 보이는 보석 한 세트가 "이건 2천 만원이고, 이건 조금 더 해요"하는 식이었다. 그분은 나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제 궤도에 올라갈 동안의 기간을 견딜 수 있겠냐,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가게를 가져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보석세공사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결국은 자신의 가게를 가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이야기했다. 순간 내가 뭔가 한참을 잘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단지 나는 탈출만을 생각하고 향후 어떤 미래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걸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던 거다. 그 걸 깨닫는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은 직장으로 돌아가서 승부를 내는 거라는 걸 알았다. 원래 보석에 관심도 없던 내가 궁지에 몰리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돌진을 할 수 있음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하나보다. 


그때까지도 창원분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서울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창원 사람들과 생활이 그리운지 구구절절 늘어놓았지만 적절히 서울생활을 잘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너무너무 힘들고 죽을 만큼 힘들다고 지금 당장이라도 사표 던지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서울 가는 것을 말리는 많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올라온 서울생활인데, 견디지 못하고 내려가서 "그래,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은 죽기보다 듣기 싫었다. 


그 깨달음이 있고 나서였나 보다. '힘들어 죽겠다', '내일 당장 때려치운다'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도 다음날 아침, 거부하는 몸뚱이의 목덜미를 끌어서 사무실로 옮겨놓는 힘이 생긴 것이. 그건 세상으로 탈출하기에는 아직 너무 나약하다는 스스로의 자괴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슬픈 몸부림도 아니었다. 그냥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자의 담담한 몸짓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쉽지 않은 직장생활이라고 했지만 일이 그렇게 힘들거나 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이동해 가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룹사 행사에 대표로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요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인사에 관한 모든 의사결정이 내 손에서 진행되었고, 상사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표정이 뚱해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다시 생각해도 참 밥맛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서울생활에 적응해갔다. 좀 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즐기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LG전자 계열사 간 합병한다는 미명 하에 다른 회사의 인사팀장과 두 달 동안 프로젝트를 하면서 회사 합병 전략을 짜기도 했고, 늦은 시간 남아 있는 팀원들과 술을 마시고 즐기기도 했다. 테헤란로에 있는 회사는 강남의 문화를 즐기기에 최고의 장소였고, 회사 이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차는 나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줬다. 그때 알았다. 나에게 역마살이 있는 것을. 주말이면 혼자서 강원도로 휑하니 떠났다 오기도 했다. 서너 시간 운전해서 강릉 경포대에 30분을 앉아있다 오기도 했다. 

회사 밖의 사람들을 만날 목적으로 당시 유행이었던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을 했다. 당시 유명했던 천리안에서 운영 중이었던 한백오름 산악회였다. 사람을 사귈 목적으로 가입을 했기에 나름 열심히 활동을 했다. 아마 창원 시절부터 쌓은 술 실력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역마살이 있어서 훌쩍 떠나는 것도 좋아했지만 사람을 사귀기 힘들어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다녔다. 밤새 술을 마시고 다니기도 했고 전국의 유명한 산을 돌아다녔다. 전문 산악인도 쉽게 하지 않는다는 영남알프스 종주도 그때 했고 눈 쌓인 지리산을 종주하기도 했다. 영남알프스 종주를 하고 온몸이 땀에 절어 나타난 나를 보고 혀를 내두르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사흘 동안 세수는커녕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나타는 내 모습은 바로 거지였다.


회사에서의 책임도 높아지고, 서울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졌던 서울생활에 익숙해지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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