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앞 서촌에는 맛집이 정말 많다.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있는 골목에는 안주마을, 계단집 등 유명한 맛집이 포진돼 있다. 좀만 더 올라오면 칸다소바, 토속촌, 효자왕족발, 호라파 등이 포진돼 있다.
반대쪽 7번 출구로 나가면 지난번에 소개한 할매집이 있고, 신안촌도 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맛집이 줄지어있다. 요즘에는 괜찮은 분위기의 바도 생겨 신선하게 즐기기 좋다.
또 다른 반대쪽인 3번 출구로 나가면 대통령이 갔던 뚱낙원(개인적으로 맛집은 아닌 것 같다)과 생선구이소반, 홈보이서울, 비텔로소띠, 대선칼국수 등이 있다. 오늘 소개할 집은 쟁쟁한 맛집들 사이에 있는 투박한 집이다.
3번 출구 식당 골목 쪽으로 들어오면 본죽이 있는데 이걸 바라보고 쭉 걷다 보면 포르투갈 카페 '쏘리 에스프레소바'가 등장한다. 이 집은 그 옆에 있다. 상당히 요즘 가게 같은 간판이며 안에는 깔끔한 인테리어가 보인다.
2022년 4월경 이 집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간판 이름이 '김치찌개'인데 홍어를 판다고 해서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화문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집이 변호사회관 근처에서 꽤나 단골장사를 오래 했던 집이라는 소식을 알게 됐다.
가야지 가야지 하던 중 나영석 PD가 운영하는 채널 '십오야'의 프로그램 '맛 따라 멋 따라 대명이 따라'에 이 집이 등장했다. 프로보쌈러, 수육에 미친 사람으로서 이 프로그램에 수육이 나오는 걸 보고 흥분했다. 그런데 나PD와 배우 김대명 씨는 이 집의 수육이 아는 맛과 정반대라고 그랬다. 고기가 질기고 김치는 쿰쿰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덕인지 기대감을 한껏 내려놓은 채로 이 가게를 향했다. 직접 먹어보고 판단하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다르지 않을까 걱정도 하면서 이 집을 찾았다. 다행히 여러 번 이 집을 방문했던 동료가 있어서 그분과 함께 찾아 맛의 객관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골목집김치찌개 메뉴판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홍어 냄새가 가득 풍긴다. 점심인데도 누군가는 홍어를 먹는 것인지 삭힌 홍어의 향이 가게 안에 꽉 차있다. 못 맡을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에 들어가면 당황할 수 있다.
가게 안은 어수선하다. 어머니 두 분이 음식을 만들고 서빙하고 하시는데, 투박함이 물씬 느껴진다. 아마 한 어머니는 일이 바빠지자 도와주러 오신 것 같다. 식당 특성상 점심에는 웨이팅이 없었다. 아마 저녁에는 사람이 좀 찼을지도.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한다. 삶은 돼지고기와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삶은 돼지고기는 오래 걸린다고 한다. 솥에 찌기 때문이다. 예전에 엄마가 밥솥에다가 돼지고기 수육을 쪄준 적이 있는데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맛이 아닐까 생각하며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달라고 말씀드린다. 그럼 친절한 목소리로 "김치찌개랑 같이 줄게~"라고 하신다.
가게 분위기 상 술이 빠질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소주 한 병을 꺼내든다. 반주만 하자는 약속으로 반찬과 함께 소주를 한 잔씩 마신다. 반찬이 정말 훌륭하다. 콩나물무침, 달래무침 등 각종 반찬이 5~6개 정도 깔리는데 조미료 하나 없이 만든 맛이다. 상당히 매력적이다. 반찬에도 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다.
다른 보쌈식당들과 달리 이 집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 30~40분씩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진득하니 앉아서 수다를 떨다 보면 투박하게 썰린 고기와 김치가 그릇에 담겨 나온다.
이제부터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이 집 삶은 돼지고기는 여느 보쌈집의 그것과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고 새로운 맛은 아니다.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해준 수육의 맛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시골 어디선가 먹은 맛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먹었던 수육의 맛이 떠올랐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내면에 부드러움을 겸비한. 고기를 있는 그대로 삶아낸. 절대로 꾸밈이 없다. 꾸밈없이 고기 그 자체의 맛이다.
나PD와 김대명 씨는 이 고기가 잡내가 나고 질기다고 했는데 나는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 집 고기의 냄새는 잡내가 아니다. 돼지고기 본연의 향이다. 먹기 불쾌한 냄새도 아니고, 못 먹겠을 돼지비린내도 아니다. 고기향, 수육의 풍미를 살려주는 고기의 향이다.
질기다면 질기다. 다른 유명한 보쌈집들, 요즘 보쌈집들에 비하면 충분히 질기다. 하지만 고기 자체가 질기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부드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질기지도 않다. 먹기 불편하지 않다. 이 집을 일부러 못 오게 하려는 속셈이라면 "질기다"라는 말에 동의해주고 싶을 정도로 이 집 고기는 훌륭하다.
김치는 두 가지 종류인데 하나는 신김치고 하나는 갓김치다. 쿰쿰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 있는데 그 정도로 꿉꿉하거나 못 먹을 수준은 아니다. 나는 할머니네 집에서 먹었던 김치가 이런 맛이었다. 비비고 김치나 종갓집 김치, 아니면 일반 보쌈집에서 먹는 겉절이나 보쌈김치를 떠올린다면 단언컨대 다른 맛이다. 그래도 내가 선호하는 맛은 아니지만, 무언가 가슴 한편에 있는 아련함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고기와의 조화? 당연히 훌륭하다. 이 집은 신기하다. 먹어본 맛이고 익숙한 맛인데 요즘에 쉽게 찾아보기 힘든. 그래서 누군가는 먹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낯설 수 있는. 하지만 내게는 잊고 살던 어떤 맛을 떠올리게 해 준 그런 고기를 선사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요즘 구워주는 삼겹살, 육즙이 가득 찬 삼겹살, 각종 양념과 곁들여 먹는 삼겹살, 고기 숙성이 잘 된 삼겹살이 인기다. 그런데 기억 저편에는 어릴 때 투박하게 굽던 시장삼겹살이 우리에게는 남아있다. 그런 집이 지금은 많지 않지만, 누군가는 찾는다. 그리고 꽤나 맛있다. 물론 이름 날리는 삼겹살 집들이 훨씬 고급지고 훌륭하지만, 투박한 시장삼겹살도 맛있다.
이 집의 삶은 돼지고기도 딱 그런 느낌이다. 요즘 찾아보긴 힘든 예전의 맛이지만, 맛있다. 누군가는 처음 먹어보는 맛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누군가에겐 할머니가 해주던 수육의 맛이 생각나게 해 주기도, 누군가에게는 시골집에서 투박하게 삶은 수육이 생각나게 해주기도 하는 그런 집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골목집김치찌개 전경
정갈하게 썰려 나온 보쌈만 많이 찾아다닌 나에게 이 집은 소중한 집이다. 최고의 집, 최선의 집, 극찬할 집은 아니지만 색다른 집이다. 매일 비슷한 류의 보쌈만 보다가 새로운 형태의 고기를 만난 것 같아 즐겁다.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천짓골에 이 집을 빗대어 보고 싶다. 물론 고기맛만 따지면 천짓골에 비할 수준이 아니지만, 이 집은 천짓골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수육이 아니라 특별하다. 조금은 특이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게 뭐지? 이건 무슨 맛이지? 나PD의 말만 따나 누군가는 맛없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평범하고 정갈하고 보편적인 맛을 좋아하는 내가 느끼기에도 맛있을 정도면 불쾌함 없이 사람들도 먹을 수 있는 맛이다.
그냥 맛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질기지도 않고 맛있다. 묘미에 가깝다. 묘하게 맛있으며 자꾸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매력적인 곳이다.
다른 메뉴도 궁금해진다. 가게 이름이 김치찌개라 먹어봤는데, 이 집의 김치찌개도 신기하다. 아마 신김치를 넣어서 끓인 김치찌개라 그런지 양념이 깊다. 조미료나 멸치, 된장육수의 맛도 아니고 진짜 진하다. 김치 자체의 양념만으로 끓인 맛이다. 맛없을 수가 없다.
할머니가 내게 돼지고기 수육을 해준 적은 내 기억 상에는 없다. 그런데 이 집의 맛은 왜 할머니를 떠올리게 할까. 반찬 때문일까. 아니면 약간은 쿰쿰한 김치 맛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맛, 어쩌면 추억 저기에 있는 맛을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가 그리워지고, 무언가가 한편에 남아있다. 다 먹고 나오면 공허함까지 살짝 느껴진다.
이 집을 들어올 때 설명했던 쏘리 에스프레소 바도 별미다. 포르투갈식 커피를 파는데, 에그타르트도 포르투갈식이다. 상당히 맛있다. 입가심으로 먹을만하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약간의 공허함을 안은 채 서촌 먹자골목을 걷는다. 이상한 투박함과 정갈하지 못한 데코레이션, 쿰쿰함이 살짝 느껴지는 김치와 요즘 수육 같지 않은 고기. 그 모든 것이 정체 모를 추억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