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평택고여사집냉면
시원한 국물이 당기는 날이 있다. 더운 날엔 더더욱 그렇고 덥지 않은 날에도 가끔씩 생각난다.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하는 날에는 따뜻한 국물이 떠올라야 정상이지만, 이상하게도 차가운 국물을 냉큼 들이켜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이 집이 생각난다. 갈비탕처럼 달달한 국물, 그런데 갈비는 한 조각도 없고 따뜻하지도 않은 국물. 거기에 더해진 얇게 썰어 양념이 잘 스며든 수육. 바로 평택고여사집냉면이다.
평택고여사집냉면은 평택에 있지 않다. 연희동 복판에 있다. 이 집은 3대째 이어오고 있다고 가게에 광고가 돼 있다. 누구부터 누구까지 가게의 명맥을 이어왔는지 나와있으며 가장 마지막 3대째 이어받은 어머니가 가게 내부를 굳건히 지키고 계신다. 1930년대부터 이어져 온 집이라고 한다. 본래 북한 평안도에서 시작했고 1974년에 경기도 평택에서 고박사냉면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왔는데 2대 사장님의 따님이 신촌으로 고박사집냉면을 열었다. 이후 평택고여사집냉면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 중이다. 정확한 역사야 알 수 없지만 꽤나 복잡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테이블이 꽤 많은 편이고 자리마다 메뉴판이 세워져 있다.
자리에 앉아서 냉면과 제육을 주문한다. 이 집에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건, 역시 이북식 식당이기 때문에 수육은 소수육, 제육은 돼지수육이라는 점이다. 뒤에 ‘무침’이 붙는 건 말 그대로 무침이라는 뜻이다.
주문 후 자리에는 오이고추를 썬 반찬, 무채가 나오고 수육용 찬도 같이 나온다. 따뜻한 육수도 제공되는데 냉면의 맛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상당히 달고 깊은 맛이 난다.
10분 정도 지나면 주문했던 메뉴가 나온다.
이제부터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이 집의 고기는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다. 그 말은 쉽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세상에 어떤 수육(제육)이 쉽게 만들어지겠냐만. 이 집의 수육은 ‘쉽게 느껴진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가장 익숙한 맛이다.
익숙한 맛이 느껴지는 데에는 익숙한 재료가 쓰인 영향이 크다. 우선 월계잎의 향이 끝에서 살짝 느껴진다. 돼지고기 잡내를 빼기 위해 보통 많이 넣는 재료다.
된장과 생강의 맛도 느껴진다. 잡내를 잡는 것은 물론 양념까지 밴다. 생강을 통해 간이 잡히고 된장을 통해 간이 배어든다. 이 집의 고기는 간이 배어있다. 된장 향이 강하게 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너무 얇게 썰었다는 점이다. 육즙이 금방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냉면과 함께 먹기에는 좋지만, 고기를 뒀다가 나중에 먹으면 퍽퍽한 맛만 남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려보다는 질기지 않았지만, 육즙이 날아가면서 말라붙은 비주얼이 식욕을 떨어트렸다.
돼지고기 잡내도 살짝 남아있다. 간이 잘 잡혔다면 잡내가 없이 육향만 남을 텐데, 간을 지나치게 세게 잡으려다 보니 은은히 배어든 잡내를 잡지 못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적당히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김치는 무난한 무김치다. 아무래도 이북식이다 보니 간이 심심한 편이다. 아이러니한 건 수육의 간이 센 편인데 김치는 간이 심심하다니. 의외였다.
간이 심심한 덕분에 돼지고기의 맛을 해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지만, 글쎄 그렇다고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집이 보쌈집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긴 어렵지만 ‘냉면집’으로서는 정말 맛집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물론 평양냉면 특유의 심심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집을 싫어할 수도 있다. 오히려 함흥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중에서 면이 질긴 것보단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맛집이다.
국물을 들이켜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심심하고 은은한 맛, 우려낸 깊은 맛보다는 양념의 진한 맛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하게 말해 면보다는 밥을 말아먹고 싶을 정도로 깊은 맛이다. 오묘하게 면이랑 잘 어울리는데, 만약 함흥냉면처럼 상대적으로 질긴 면이 들어갔다면 맛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밀면으로 채워지면서 잘 끊기고, 양념도 잘 배어 들어가 있다. 이 집만의 신기한 ‘평양냉면’이다.
문득 처음 이 집이 생겼을 때 냉면 맛이 궁금해진다. 과연 지금의 맛이랑 같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이 됐고 지금의 맛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지 의문이 든다.
어쨌든 갈비탕 같은 평양냉면 국물과 면, 거기에 수육 한 조각 올려서 먹으면 나름대로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비록 그 맛이 완벽에 가깝진 않고 조금은 투박하고 조잡하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다.
쉽게 먹을 수 있는 수육이 기다리는 곳, 평택고여사집냉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