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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Oct 24. 2022

[애피타이저] 어른의 맛, 식전주

애피타이저와 디저트

몇 해 전 여름, 여름휴가로 이탈리아에 갔다. 2주가량의 길지 않은 여행 기간이었지만 부지런히 움직일 작정을 하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부츠의 형상을 닮은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며 내려갔다. 그 덕에 꽤 많은 도시를 거쳤다. 밀라노에서 시작해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를 거쳐 중부의 아시시, 그 아래 로마, 남부의 폼페이와 아말피까지.  


지중해의 햇살은 양도 그렇고, 질도 그렇고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차원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무리 일정이 타이트 해도 한낮에 만큼은 머리 위에서 노려보는 태양의 시선을 막아줄 커다란 차양을 드리운 노천카페로 피신하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치지 못한 낯선 공간에 오면 두리번거리는 습관 탓에 자연스레 다른 이들의 테이블을 넘겨다 보았다. 밀라노에서부터 대부분의 테이블에 빠짐없이 놓여있는 오렌지빛 음료. 저 음료가 뭘까 싶어 알아보니 '스프리츠'란다. 이탈리아에 여행 온 한국인의 블로그 후기글에 자주 보였다. 


말그대로 핫한 음료. 그와 함께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끌리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식전주? 스프리츠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대표적인 식전주란다. 맙소사. 어째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설정을 가진 술의 존재를 여태껏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늦게 알아버린 나 자신을 위로하듯 와인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1일 1 스프리츠를 마셨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몇몇 국가를 여행하며 다양한 식전주를 접했다. 대부분 낮지 않은 도수의 술이지만 적당한 사이즈의 잔에 담겨 있기에 부담 없었다. 향을 음미하며 코를 깨운다. 그 후 이내 홀랑 입에 털어 넣으면 비어 있는 식도와 위장을 따라 찌르르 흐르는 게 느껴진다. 마치 소화 기관의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낯선 감각. 단전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약간의 취기를 느낄 때쯤 식사가 서빙된다. 식전주가 조율해낸 그 흐름이 좋았다. 


사실 소식을 하는 편이라 전식과 본식, 후식을 갖춰 제공하는 파인 다이닝에는 코스마다 남긴 음식을 먹어줄 남편 없이 못 간다. (남기고 다음 코스를 먹어도 된다. 그런데 남긴 접시가 주방에 도착하면 '내 음식이 맛이 없나?'라 상심할 셰프의 얼굴을 한 번 떠올린 이후부터 그렇게 못하고 된 극강의 공감능력 소유자라 그러지 못할 뿐이다.) 남편은 농담처럼 "넌 애피타이저를 먹을 능력이 없어."라 말했지만, 식전주를 애피타이저로 즐기게 된 이후 난 실로 애피타이저 계의 푸드 파이터라 불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  


해외의 식전주 문화를 접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서울 내 굴지의 평양냉면집을 들락거리며 '선주후면'이라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문화도 알게 되었다. 뜻을 간략히 풀자면 '술 먼저 면은 그 뒤에' 정도 되겠다. 우리도 있었다. K-식전주 문화. 정갈한 마음과 다소곳한 자세로 선주 후면을 즐기고 있다. 은둔의 평양냉면 고수들에 비하면 소박한 평린이지만 맑은 소주로 코팅한 위장에 받아내는 냉면의 맛은 그 전과는 필시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코로나 상황으로 요즘은 부쩍 집에서 남편과 함께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한다. 요리를 하면서도 자연스레 '식전주 한잔?'이라며 깔끔하게 떨어지는 와인을 반 잔씩 마시게 되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뭐가 좋냐고 묻는 한 아이에게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이젠 좀 더 자세하게 말해야겠다. 어른이 되니 식사 초장부터, 애피타이저 삼아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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