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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Nov 13. 2024

E의 청첩장

E와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로 만났다. 전학 온 E는 세상에 대한 여러 호기심이 담긴 동그란 눈과 목젖이 보일 것만 같이 시원하고 호탕하게 웃는 법을 아는 애였다. 알고 보니 우리는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하기 전이었던 우리는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과 단지 안 놀이터와 만화책 대여점과 엑스파크와 탄천과 뒷산과 서로의 집에 놀러 가 기운차게 놀았다. 양기 가득한 초등학생들은 뭉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와 나를 포함한 친구무리는 우리가 갈 수 있는 반경 안의 많은 곳들을 소년 만화 주인공들처럼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모든 관계의 생리가 그러하듯 우리의 관계에도 부침이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청소시간에 서로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걸레를 집어던지며 싸우기도 했으니까. 며칠 뒤 우린 울면서 화해했다. 이런 일을 강도와 형태와 장소만 바꿔가며 몇 번 반복했다. 중학교 시절엔 그녀가 인도로 유학을 떠나 한동안 약간 애틋한 펜팔 친구처럼 지냈다. 가끔 한국에 들어오면 그녀는 새로운 문화권의 또래들 사이에서 느낀 이야기를 한 보따리 가득 들고 와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조잘조잘 들려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서로 삶이 바빠 한동안 보지 못했다가 둘 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다. 대학생이 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전공에 대한 여러 지식들과,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육 봉사 중 느낀이야기, 새롭게 들어간 동아리에서 올리는 공연 이야기, 진로에 대한 고민과 방황, 사랑을 하며 느끼는 여러 가지 마음들에 대해 나누어주었다. 그녀는 용한 점집에도 관심이 많아 연애운을 잘 보기로 유명했던 집에 날 데려가기도 했다. 기운이 커다란 날붙이 같았던 언니에게 우리는 앞으로의 연애운과 결혼할 시점과 서로의 남편의 성씨와 이름에 들어갈 한자들과 그들의 전공과 직업과 성격까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방언같은 말들을 놓칠세랴 두두두두 받아 적었다. 이토록 바쁘게 세상을 탐험하는 와중에도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 나의 중요한 기점들을 함께해 준 삶의 증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을 주변인들에게 자연스레 북돋우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태어난 것만 같다. E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아주 솔직하고 열정적이고 행동력 가득한 사람. 힘세고 강한 에너자이저 건전지 같은 사람.


그런 내 친구가 결혼을 한다.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나는 전여친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전남친과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십 대 내내 바쁘게 산답시고 못해준 것만 잔뜩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후회남주가 부를 법한 청승맞은 발라드를 섞어 들으며 살짝 착잡한 마음으로 청첩장을 받으러 갔다. “야!” 하며 평소처럼 날 맞아준 E의 옆엔 E와 블루투스로 동기화를 한 듯 닮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남성분이 계셨다. 아이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초면인 분 앞이니 내 안의 최대한의 점잖음을 추출하여 앉아있겠다 다짐했었는데 각오가 무색하게 열한살 즈음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분이었다.


우리는 맛있게 밥을 먹고 탄천을 산책했다. 늦가을의 모습이 한창인 산책길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갑자기 친구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우앙! 물고기야!


요새 물고기 보기가 얼마나 힘드냐, 우리는 맞장구를 치며 냇가에 옹기종기 모였다. E의 뒤에서 우앙 물고기다! 우앙 물고기야! 를 외치는 E와 남편분을 보며 마음속에 꼭 잡고 있던 무언가가 내려놓아졌다. 다음 일정이 있어 넘어가기 전에 둘에게 좋아하는 흙길 산책로를 소개해주곤 허리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결혼식날 보자! 우리는 밝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다음 일정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플레이리스트를 골랐다.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전거의 페달을 굴렸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경쾌한 둠둠 소리에 맞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둘의 앞날이 경쾌한 자전거타기 같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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