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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Jul 31. 2019

방충망에 거미가 앉았다

장마철과 할머니

방충망 바깥에 거미가 앉았다. 그것도 아주 큰 거미가.

사실 길쭉한 다리 세 개 보이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몇 달 전부터 창문 구석으로 거미집 같은 게 보이더라니, 이렇게나 커다란 친구가 살던 집일 줄이야. 살면서 이렇게 크고 길쭉한 거미를 본 것은 처음이라 지금 나는 조금(많이) 당황스럽다.

평소에는 저 긴 다리 하나 보이지 않던 아이가 이 아래까지 내려왔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장마철 내내 제 집으로 쳐들어오던 비를 맞다 못해 내려왔다거나, 아니면 요 며칠 태풍의 영향으로 심하게 불던 바람에 제 집을 잃었다거나, 제 집을 잃었다거나…


거미집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짜여 있던 집은 어딜 갔는지 실 몇 가닥만 남아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수재민이구나. 징그럽다 외치기도 잠시 고새 안쓰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살던 그 집은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샜다. 작은 방 정중앙에서 살짝 비켜진 곳에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하면 할머니와 나는 그곳을 피해 이불을 깔았다.


방구석에서 삐딱하게 자야 하는 것도 모자라 양동이를 차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 다녀야 하고, 빗물 가득 찬 빠케스를 여러 번 갈아줘야 하는 것도 일. 혹 태풍이 온다는 예보를 보거나 조금이라도 바람이 세게 불 것 같으면 바깥 창에 테이프로 엑스자도 그려야 했다. 집은 점점 못생겨지지, 불편하기만 하지, 이런 날들이 며칠 반복되는 장마철이면 나는 점점 썽이 나는 것이다.



할머니, 비 언제 그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잔뜩 찡찡대며 입 댓 발 나와있던 나와는 다르게 할머니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통을 비우러 나가실 뿐이였다.


문득 그때를 돌이켜본다. 고작  조금 새는 걸로 방방 뛰던 어린 손녀를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지.  웃기기도, 어이없기도 하셨겠지.  내음 가득 돌던 작은 방에서 조용히 나를 달래주시던 할머니의 담담한 목소리가 생각난다.



괜찮다,  지나간다.



훅 들어온 한 마디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뚜렷하다. 나는 칭얼대던 입을 다물고 할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너무 많은 것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떤 세월을 살아온 것인지 아직도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거미는 아무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다. 문지방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할머니처럼.


얘야, 오늘따라 웬 비가 이렇게 세차게 내리니. 장마가 그치면 다시 집을 지을 거니. 다음엔 비가 내려도 쉬이 무너지지 않도록 더 튼튼한 집을 지어라. 바람 부는 것 따위, 비 조금 새는 것 따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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