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대하여_

'Nuvole bianche', Ludovico Einaudi

by 레드오렌지

어느 순간 다가오는 감정이란 예고가 없다. 천천히 고조되는 경우가 없진 않으나 그 고조되는 경우조차 낯설게 다가온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감정은 순간의 불꽃을 만나 화르륵 격노를 표한다. 마음에 안 드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는 분노가 격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순간에는 슬픔이 다가온다.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기 힘들 때는 기쁨이 찾아오고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에는 사랑이 찾아온다. 분노, 슬픔, 기쁨, 사랑. 사람이 갖는 감정이란 이렇듯 갑작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천천히 녹아들어 이제 하나가 되어버린다.


맨 처음 감정에 이름을 달아준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행동에 대한 대가로 '기쁨'이라는 단어를 내밀었을까. 단어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사뭇 의문이 든다. 왜 하필 기쁨일까? 분노는 어찌하여 분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슬픔은 어째서 사람을 울릴까. 우리는 감정이 만들어 둔 함정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마련해둔 함정에 그 이름을 가진 감정이 우연히 빠진 것일까. 감정이 나에게로 와 비로소 현실세계에 자각되면서 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감정이 이성과 섞이고 조금의 감성도 흘러들어 가 비로소 나 자신의 마음이 완성된다. 마음이란 그렇게 모든 것이 섞인 것이다. 마음이란, 그 사람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이 말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라'라고 해석한다. 나 자신의 모든 요소가 섞여 비로소 만들어지는 마음, 그리고 그 순간의 나를 보여주는 마음. 내가 화가 났을 때는 분노하고 있음을, 기분 좋을 때는 기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마음. 그런 감정을 가졌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혹은 나는 어떻게 행동할 때 어떤 감정을 갖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마음'을 아는 것이 비로소 나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제삼자가 아니다. 비로소 내가 나 자신을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부터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태어날 적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 모습을 유지한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잔뜩 흘리는 어른에게 나잇값 좀 하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감성과 이성의 혼합물인 마음은 그저 반응할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내가 지금 처한 현재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마음이 사회가 정해놓은 문화에 거스르는 건 아닐까? 혹시나 이 마음을 내비쳤을 때 세상이 내게 비난을 가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생기기에.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마음을 바라보는 주체는 오로지 자신이 되어야 한다. 문화에 거스를지도 모르는,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을지도 모르는 마음을 내가 아니면 대체 어떤 이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이가 '나'를 나에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결국은 타인이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는 건 오직 객관성뿐,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는 없다. 다른 이가 바라보는 마음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또한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판단하는 기회를 주는 순간 내 마음은 타인에게 휘둘리게 된다. 너는 지금 상황이 기쁘니? 너는 그 나이 먹고 눈물이 나오니?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그 사람이 한 말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내 마음을 내가 모르는 상태로 타인에게 내비치면 안 된다. 타인의 지배 하에 놓인 마음은 그 약점을 쉽게 노출한다. 나와 타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약점이 드러난다. 숨기려 했지만 이미 지배당한 마음은 아랑곳 않고 숨기고자 했던 것을 드러낸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는 속마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듯 내가 바라보지 못한 마음 또한 내 의지와 관계없이 튀어나간다. 그렇게 약점 투성이의 인간이 될 뿐이다. 타인에게 휘둘리고 지배를 받으며 한없이 약해 보이는 인간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다.




내성적이었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에게 세상이 불어내는 건조한 바람은 차마 쳐다볼 수 없는 쓰라린 칼날이었다. 그의 촉촉했던 피부는 바람에 점점 그 생기를 잃고 굳어가기 시작했다. 빼앗기는 습기는 피부를 갈라 뚫고 날아가며 흉터를 남겼다. 아프다. 쩍쩍 갈라지는 그 마음의 한 조각이 아프다. 지켜야지, 하며 조심스레 바른 연고 조각은 잠시 동안 피부의 갈라짐을 막아주지만 그 또한 금세 말라붙어 버리고 다시 쓰라린 상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갈 때마다 피부는 점점 두꺼워지고 날카로워져 갑옷이 되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한 뼘도 안쪽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단단해졌다. 내성적이었던 아이는 다가오는 건조한 바람을 비로소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갑옷은 세상의 풍파를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지만 그것은 다른 이를 다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 목적은 여린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 하나였다. 촉촉하고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호기심 많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여린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것이 갑옷이 상처와 쓰라림을 견뎌낸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그렇게 당당하게 거친 바람에 마주설 수 있게 해 준 갑옷 덕에 여린 아이는 여전히 촉촉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적들은 바람에 실려 다가왔다. 그저 지나가던 행인들도 적이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아이의 거친 갑옷을 보고 천천히 공격할 부분을 찾았다.


아이의 갑옷은 날카롭다. 단단하며 거칠다. 겉에서 보면 속을 알 수 없으며 그저 공허한 눈길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거친 표면은 손을 대는 적들에게 깊은 상처를 낼 듯하고 툭 튀어나온 부분에 손을 찔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런 갑옷도 연약한 부분이 있었다. 외피 사이사이 숨겨진 감정의 공간은 아직 충분히 단단해지지 못했다. 아직 마음속 여린 아이는 그 숨겨진 공간을 외부에 내보일 준비가 안됐다. 여린 아이는 그 공간을, 부끄럽고 쑥스러운 감정 가득한 그 공간을 숨기고 싶었지만 적들은 그 공간이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아이는 갑옷으로 그 공격을 방어하고자 몸을 웅크리지만, 적은 그 사이를 끝내 찾아내 날카롭게 벼려진 감정의 창을 찔러 넣었다.


어느 순간 그 연약한 공간에 찔러 넣은 뾰족한 감정의 창끝은 마음속 여린 아이의 살 끝에 닿아 기어이 핏방울을 내고야 말았다. 촉촉했던 여린 아이의 둥지는 어느새 핏빛 물결로 가득 차버리고 아이는 세상이 무너져라 소리를 지르며 오열했다.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숨겨진 공간이 기어이 드러나게 된 상황이 슬펐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틀린 아이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흘러나온 피와 오열이 섞여 검붉은 진액이 상처 밖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적들은 그 광경을 보며 세상이 떠나가라 비웃었다. 그래, 단단한 갑옷이 생겨봤자 너는 여린 아이일 뿐이야.


아이는 견딜 수 없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숨겨진 공간이 강제로 열리고야 말았다. 적들은 한없이 자신을 비웃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온 갑옷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바람을 마주 보고 설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만들어낸 갑옷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검붉은 진액에 둘러싸인 여린 아이는 마지막 여력을 다하여 자신을 찌른 창을 향해 손을 뻗어 꽉 움켜잡았다. 그렇게 그는 남아있던 손에 깊은 상처를 만들어내며 자기 자신에게 창을 집어넣었다. 창은 점점 더 깊게 찔러가고 아이는 계속해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단말마를 남기고 조용해졌다.




평생을 가꿔왔던 갑옷이 무용지물이 되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공간을 적들에게 내어준 여린 아이는 누구일까? 그는 죽어가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토록 아팠을까?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옆에 있어줬더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누군가에게는 여린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볼 테고 누군가는 주변 인물 중 한 사람을 떠올릴 테다. 여린 아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겠다. 여린 마음을 가진 아이의 죽음, 여린 마음의 죽음, 마음의 죽음. 마음의 죽음을 다룬 이 이야기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마음의 한 조각이 방황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세상을 헤매고 있다. 목적지를 찾고자 하지만 당장은 목적지가 보이지 않고 끝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조차 모른다. 나는 나를 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나를 모르는 것은 나였다. 방황하는 내 마음의 조각에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이어야만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다른 이가 제시하는 목표에 흔들려서는 안 됐는데, 내가 내 마음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었어야 하는데. 방황한 마음이 돌아올 수 있을까? 담담히 적어내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두렵다. 이 숨기고 싶은 공간이 남에게 드러나 창에 찔리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바라보려 한다. 나약한 한 인간이 검붉은 진액을 뒤집어쓰고 황야 한가운데 웅크려 신음하지만, 비록 드러나 보인 여린 마음의 공간이 쓰라리지만 그럼에도 맞서려 한다. 방황하는 마음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비로소 나 자신을 알아가려 한다. 뒤집어쓴 검붉은 진액이 아직 몸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지만 이겨내 보겠다. 창끝에 찔린 상처를 되찾아온 마음으로 치유하겠다. 그렇게 바라본 마음 끝을 상처에 집어넣고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마주해 갑옷을 만들고 다시는 찔리지 않을 거대한 거인이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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