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하여_

'Home Sweet Home', 카더가든

by 레드오렌지

창문 밖이 번쩍인다. 첫 번째 번쩍임 이후 2초를 센다. 우르르 쾅쾅하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이내 번쩍임과 소리가 순서 없이 섞여 그야말로 무아지경의 천기를 보이고 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맺힌다. 중력에 의해 흘러내릴 새도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날려진다. 멀리 비바람을 피해 우산에 몸을 숨긴 몇몇이 보인다. 길거리를 시끄럽게 하던 길고양이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풍파에 몸을 그대로 노출시킨 채 비에 축축 젖어버린 몸을 이끌고 들어간 건물 기둥 옆 작은 틈새에 숨어, 다가오는 밤의 찬기에 몸을 덜덜 떨고 있을 그 가련한 생명체에 연민을 느낀다. 그들을 생각하며 창문을 다시 바라본다. 어두워진 바깥을 배경 삼은 빔프로젝터 마냥 실내를 비춘다. 열심히 냉기를 뿜어내는 에어컨과 일정하게 밝기를 유지하는 형광등이 보인다. 냉장고 속 가득 들어찬 닭가슴살과 맥주 몇 캔, 그리고 반팔을 입고 책상에 앉아 타자를 치고 있는 사람 하나가 보인다. 이곳은 나의 보금자리, 피난처. 집이다.




집은 피난처다. 잘 만들어진 집은 밖에서 벌어지는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나를 지켜준다. 원래 집의 목적이 그렇다. 지금이야 각종 투자의 대상이자 부와 권력을 표출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지만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해주는 것이 집의 본질이다. 동굴을 처음 발견한 인류의 조상은 집이 가져다주는 생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굴은 야생동물로부터 무리를 보호해주고 모닥불의 온기를 머금고 비를 피하게 해 준다! 밖에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동굴 안에서는 평온하다. 현대의 집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능을 발휘한다. 뜨거운 여름날의 햇볕을 피해 집에 들어와서 에어컨을 켜는 상상을 해보라. 폭염도 재해라는데 그 재해를 완벽하게 방어해주는 곳이 집이다. 태풍은 또 어떤가, 암만 바람이 불어도 집안에 있으면 세상 고요하다. 지진에는 좀 위험할 수도 있겠다만...


집은 유일한 내 공간이다. 나만의 공간이 중요한 시대다. 나만의 공간이란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이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그 사회성 속에서 피로를 느끼는 경우가 생긴다.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테다. 피로를 주는 원인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 관계에서 나 자신을 분리해주는 것이 바로 집이다. 그래서 집이 유일한 내 공간이라는 점은 단순한 소유의 개념을 넘어선다. 직장 상사에게 열심히 혼났을 때와 같이 부끄러운 일을 겪고 돌아온 집에 오로지 나 혼자 존재한다는 느낌은, 그러니까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나 혼자만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 느낌은 그 자체로 치유다. 아무도 내 표정을 알 수 없다. 아무도 내 기분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집안에 혼자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롭다. 혼자서 욕을 하던 울던 웃던 아무도 모르기에. 그렇게 피로해진 감정을 자가 치료하는 것이다. 누구도 없고 나 혼자 있는 이 집에서.


집은 목표다.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당신의 경제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열에 여덟은 '내 집 마련'이라고 답변하지 않을까.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그 욕망은 우리의 월급을 절반이나마 쪼개서 저축하게 만들고, 뉴스에서 들리는 집값 상승 하락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세상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마음 놓고 쉴 곳 하나 찾기가 왜 이렇게나 힘드냐는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누군가는 몇십채의 집을 거느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명의로 된 집 한 채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지만 그래도 집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이다.




모험을 즐기며 세상을 유랑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착하고 싶어 한다. 은퇴하고 평화로운 시골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사람은 어째서 정착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근본적으로는 정착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지역이 정착지이기에 필요한 물자를 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정착지에 같이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 협력하는 이점도 있다. 또한 정착은 사람에게 '돌아갈 곳'을 제공해준다. '돌아갈 곳'이라는 개념은 의외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 그녀에게 청혼하겠어!"라고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돌아갈 곳, 나를 반겨주는 곳의 존재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정착과는 거리가 다소 멀다. 적어도 이 일을 그만두기까지는 그렇다. 법적으로 1~2년에 한 번씩 근무지가 바뀌고 그때마다 이사를 해야 한다. 내가 속한 곳은 진해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진해에 거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료들은 짐을 가볍게 꾸린다. 마치 몽골 초원에서 게르를 짓고 살아가는 유목민족이 된 듯 말이다. 이사라는 게 워낙 품이 많이 들기에 애초에 포장할 짐의 양을 적게 하는 쪽이 낫다. 나 같은 경우에는 따로 짐을 꾸리지 않도록 여러 개의 리빙박스에 물건들을 보관하여 사용한다. 이사를 가야 할 때 따로 짐을 포장할 필요 없이 리빙박스만 옮기면 되도록 말이다. 좋게 말하면 모듈화, 최적화다. 어렸을 적 국어시간에 읽었던 김동리의 '역마'가 떠오른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삶이 그때는 이해가 잘 되지도 않았고,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라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역마의 삶을 누구보다 잘 체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역마의 삶이 마냥 부정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정주 문명의 한 개인이 유목 문명의 한 개인에게 품을 가장 큰 질문은, "세상은 얼마나 거대한가요?"일 것이다. 교통수단이 현대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 정주 문명의 사람들은 대개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에게 있어 '세상'이란 곧 자신이 사는 그 마을 그 자체였고 전부였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고 있는 노인일 것이고, 바깥 마을의 소식은 어쩌다 오는 상단의 상인에게서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이들에게 유목민족은 그야말로 세상을 유랑하는 탐험가들이었다. 저 넓은 초원에서 동서남북을 오가며 다양한 식생과 환경을 경험한 유목민족의 세계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넓이를 아득히 초월한 수준일 테다. 몽골족은 그 넓은 유라시아의 초원을 누볐다. 툰드라와 사막, 넓은 대양과 거대한 산맥까지 경험한 그들의 세계관을 생각해보라. 바다를 누비던 바이킹은 또 어떤가, 그들이 가지고 온 바닷속 신비로운 생물들, 저 하늘 높이 비단결로 울렁이는 오로라의 향연, 북쪽에는 영원히 눈이 내리는 곳이 있다는 설화까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돌아다닌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이 전부 자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전부 나의 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에서만 살아오던 나에게는 서울만이 내 세상이었으며 타 지역의 문화, 생활상은 생각조차 안 했다. 그만큼 세계관이 좁았다. 지방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고, 다양한 지역에서 살아본 지금은 좀 다르다. 서울에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의료서비스를 외진 지방에서는 당연하기는커녕 긴급상황에서도 편히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한반도에 얼마나 다양한 기후가 있는지도 깨닫는다. 서울의 겨울과 이곳의 겨울은 다르다. 툭하면 눈이 내리고 도로가 얼어서 운전하기 어려웠던 서울과는 달리 이곳은 눈 구경하기가 정말 힘들다. 윈터 타이어를 준비할 필요 없이 사계절 타이어 하나로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다. 식문화는 또 어떤가. 참기름과 마늘, 쌈장을 비벼서 만들어내는 막장을 예로 들자면, 서울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것을 이곳에서는 회를 먹을 때면 항상 찾게 된다.


세계관이 확장된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지 깨닫게 된다. 내가 서울에서만 계속 살았다면 당연히 모든 것의 기준으로 서울을 생각했을 것이고 국토종합발전이 왜 필요한지 납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만 해졌을 것이다. "뭐? 동네에 이마트가 없다고?"라는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세계관의 확장은 중요하다. 다양한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겸손과 인정을 바탕으로 한 나 자신의 성장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각 지역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리스 문화에 흡수시킨 헬레니즘 문화를 바탕으로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으며, 제논이 스토아학파를 창설할 수 있었다. 유레카로 인해 발견한 부력을 통해 점점 거대해진 배는 지금 우리의 무역로를 책임지고 있으며 불행은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는 스토아 철학을 통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수양하고 있다.




세상 사는 게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데 집이 그렇다. 불평하면 끝도 없이 불평할 수 있지만 또 긍정적으로 보면 끝도 없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집,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집. 그래도 집에서 누워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해지는 집. 더울 때 시원한 집, 추울 때 따뜻한 집. 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집. 에어컨 대신 선풍기가 돌아가는 집, 보일러 없이 두꺼운 솜이불만으로 겨울을 나는 집. 높은 빌딩 위의 타워팰리스, 언덕 위의 반지하. 혼자 사는 집, 가족과 사는 집. 단칸방의 추억, 왁자지껄한 분위기, 이 건물, 이 세상. 그 집들이 모여 비로소 보금자리가 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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