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17. 설마 저게 샤워기는 아니겠지
우붓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비에가 노래를 부르던 투어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코모도 아일랜드 트립'.
코모도가 뭔지도 몰랐는데, 배를 타고 삼박 사 일간 섬들을 여행을 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냅다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난민 생활을 하게 될 줄도 모르면서... 바보... 바보... 멀미꾼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한화로 십오만 원 정도에 3박 4일이니 타이트한 일정이 될 게 뻔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해보기 전에 생각만으로 가늠해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저질러 보며 살려고 합니다(도박이 아니라면요). 그렇게 사 일간의 '모아나' 체험기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고됨의 신세계를요.
제 영원한 인생 영화는 '타이타닉'입니다. 그런 선상 크루즈까진 생각지도 않았지만 (솔직히 잭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기대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배를 타고 섬들을 여행한다는 건 꽤나 기대되었습니다. 코모도 아일랜드 주변에 아름다운 섬들을 하나하나 방문하기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드는데, 이렇게 보트 투어를 이용하면 합리적인 비용에 모두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원한 이상형 잭 도슨을 그리며 한참을 달려 산 중턱에 도착해보니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스태프들이 준비해준 아침은 묘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먹던 옥수수 전과 시장 도넛 맛이 나 계속 손이 갔습니다.
미리 사 일간 마실 맥주를 주문하고 돈을 치른 후 다시 두 무리의 버스로 나뉘어서 선착장을 향해 세 시간 가까이 달렸습니다. 맥주는 미리 많이 사둬야 했습니다. 배 위에서 한 병 한 병이 어찌나 소중했는지. 미리 박스로 사 왔으면 나중에 현대판 봉이 긴 선달도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간식도 마찬 가지입니다. 꽉 끼는 버스에 탔을 때부터 타이트한 삶이 펼쳐지리라는 심상치 않은 복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위에 허벅지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던 차에 드디어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보트에 올라보니 양 옆에 걸터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붙어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스태프가 바닥 뚜껑을 열곤 쓸 짐만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이 안에 보관하라고 말했습니다. 갈아입을 옷, 잠 옷, 세면도구 등 한 짐을 꺼내 놓고 가방을 집어넣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꺼낸 짐의 십 분의 일만 손을 댄 것 같습니다. 거의 사일 내내 수영복만 입고 그 위에 똑같은 원피스만 걸쳤다 벗었다 하는 최소한의 삶을 살았으니까요.
대체 화장실은, 샤워실은, 침실은 어디 있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공용공간 오른편 벽에 붙어있는 샤워헤드를 가리키며 저게 우리 샤워실인가 보다 하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깔깔 웃었는데 네, 그게 저희 모두의 샤워실이었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 샤워헤드 가요.(큰 웃음)
그러고 있는데 자비에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위층에 침실이 있으니 짐을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니 1.3 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가로로만 널찍한 공간에 침대 매트라기엔 얇고 요가매트라기엔 두꺼운 파란 매트들이 스무 개가량 펼쳐져 있었습니다. 들어가고 나가려면 몸을 반으로 접고 걷거나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할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드나들기 쉽겠다고 침실 입구 사다리 옆에 자리를 잡은 스테판은, 밤마다 화장실 가는 사람들이 몸 위를 넘어 다니는 진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제 자리는 스테판 자리를 넘어가야만 들어갈 수 있는 끝자리라 매번 살금살금 그의 위를 넘어가다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스쳐 깨우거나 팔힘이 부족해서 부들거리다가 깨우곤 했습니다. 다행인건 워낙 장난끼많고 유쾌한 청년이라, 늘 먼저 몰래 넘어가려고 씨름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웃음을 참고있어서 저도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원래도 화장실을 자주 가는데 맥주까지 마시고 잠자리에 드니 화장실 가고 싶은 걸 참으며 고민고민 했습니다.
위층에 있는 침실은 낮에면 뜨겁게 달궈져서, 낮잠을 자던 사람들도 구워질 것 같은 공포감에 하나둘씩 매트를 끌고 밖으로 나와 야외에 침대를 깔고 자곤 했습니다. 나중에 요령이 생긴 사람들은 밤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야외에서 별을 보며 잤습니다.
열악하지만 꼭 필요한 건 다 있는 보트생활에 벙벙해하기도 잠시, 상황 파악이 끝났을 즈음에 이미 배는 육지를 떠난 후였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랴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해서 어느새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는 보트의 매력에 빠져 곳곳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첫날의 풍경이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달리는 바닷바람 속에서 혼자 만의 파티에 빠져있는 사람, 보트 위에 누워 선탠에 한창인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등 제각각이었습니다.
아직은 모두 뽀송하고 말끔했던 유일했던 하루입니다. 한참을 달렸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왼편에 어느 무인도 앞에 보트가 멈췄습니다. 가서 해지는 것을 볼 거라며 사람들을 섬으로 옮기기 위해 미니 보트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온종일 바다를 눈으로 보기만 한 사람들이 수영을 해서 가겠다며 사방에서 첨벙첨벙 그대로 뛰어들어 무인도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자비에도 풍덩 들어갔으나, 겉 멋 부리고 헤엄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보다 꽤나 먼 거리에 온몸을 불살라야 했습니다. 해변가에 겨우 도착하고 기어 나와서 그의 놀란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저만 그런 게 아니었단 걸 알고 안도했습니다. 센 척하다 죽는 주 알았습니다. 역시 쫄보는 쫄보답게 살아야 하는데.
멀리서 볼 때는 별 거 없는 민둥 섬 같아서 휴대폰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헤엄쳐 왔는데, 가까이 서보니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사진을 못 찍는 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열심히 눈에 담았습니다.
저희가 간 섬은 가운데에 커다란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해변부터 그 언덕의 꼭대기까지 단 하나의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길 양옆은 노랗게 익은 황금색의 갈대밭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호빗 마을 샤이어로 가는 길 같기도 하고 글래디에이터 혹은 영화 300의 주인공의 고향 동네 같기도 했습니다. 길이 하나뿐인 섬.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는데, 잠시 쉴 수 있는 오두막도 있고 움막집 같은 집도 한 채 있어서 누가 만들었을지 궁금했습니다.
*아래는 Piktak에서 가져온 Pulau Kenawa 섬의 사진입니다.
미니보트를 타고 큰 보트로 다시 돌아오고나자, 차례대로 배에 부착되어있는 단 하나의 샤워기로 샤워를 했습니다. 샤워라기보다는 졸졸졸 갸냘프게 나오는 물에 무릎까지 꿇고 앉아 얼굴에서 소금기정도를 닦아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때 실감했습니다 앞으로 사일간 샴푸 쓸 일같은 건 없겠구나.
밥 먹을 때가 되면 가운데 돗자리 같은 것을 펴고 15인분의 음식을 내어 놓은걸 각자 퍼서 먹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처음에 채식주의자는 따로 식단을 제공한다고 들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끼니가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메뉴였어서 한 번 빼고는 구분 없이 먹었습니다. 4일간의 채식 체험기이기도 하네요. 신기하게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살은 전혀 빠지지 않은 걸 보니 역시 문제는 탄수화물이었나 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모두 맥주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방은 어두컴컴한 바다와 밤하늘 위 수많은 별 뿐이었습니다. 별빛 아래 삼삼 오오 모여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카고에서 온 프랭크와 네덜란드에서 온 스테판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퍽 웃기는 조합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할 때마다 김정은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게 슬펐는데, 프랭크가 미국에서 왔다니 모두 트럼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 웃음이 터졌습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색이 된 프랭크를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달까요. 여행 중에 미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트럼프와 총기 소지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마다 체념한 듯 웃으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보트 위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었습니다. 이름 외는데 영 잼병이지만 얼굴들은 선명합니다.
시카고에서 온 자비에 또래의 아들이 있는(!) 프랭크,
네덜란드에서 이직 기회에 여행 온 이웃집 동생 같던 스테판,
영국에서 온 일 년 간 세계여행 중인 커플,
독일에서 온 장거리 연애 후 오랜만에 재회한 커플,
우붓에서 여행하다 함께 여기까지 온 저와 자비에,
독일에서 휴가 내고 온 웃음 많던 여성분,
흥미로운 삼각관계를 보여주던 영국에서 7년 살다가 돌아가는 호주남, 네덜란드여, 네덜란드남,
남미에서 온 흥부자 언니, 선탠을 사랑하던 사롱녀, 잘생기고 마음씨 따뜻했던 청년, 스위스 거주남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남미에서 자란 레게머리의 자유청년 스테판
그렇게 세계를 축소해 놓은 듯 유럽과 북남미, 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한국에서 온 열여섯 과 롬복 출신 스탭 다섯 명의 사서 고생하는 사일 간의 항해가 둘째 날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물론 잭 도슨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