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의 낮과 밤

발리에서 생긴 일#16. 길리섬에서의 나날들(하)

by Redpanda

적도에 위치한 길리의 낮은 일 년 내내 무덥습니다.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바닷속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파라솔 밑에서 책을 읽다가 해 질 무렵에야 그늘 밖으로 슬슬 빠져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타오르는 듯한 석양 아래에서 패들보트를 타고 다른 이들은 해변가 식당에 앉아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하루 종일 침묵하던 입을 엽니다. 그렇게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그때부터 섬은 ‘밤낮’이 바뀐 듯 새로운 열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하루는 섬 전체의 전망을 보기 위해 중심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종종 숙소 주변까지 웬 염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대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언덕 위에 염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도에 쓰여있는 이름도 없는 ‘Cave(동굴)’표시를 보고 친구들이 궁금해했는데 입구 조차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입구인 듯했습니다. 뚤레뚤레 언덕을 내려와 해변으로 가는 길에 나뭇가지를 주워 캠프파이어를 만들고 잠시 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가 지는 시간에 찾아오곤 하는 적적함이 가득 차올랐다가 어느새 한 번 놀아볼까 하는 밤의 활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석양을 보기 위해 올라간 뒷동산
뒷동산을 점령하고 있던 염소들
해지는 것을 기다리며
숙소 사람들과 캠프파이어


알 수 없는 설렘을 안고 칵테일을 한 잔 하러 해변대로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창 나초를 집어먹고 있는데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며 머리 위 나무 위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가 모래 위로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다람쥐 같은 게 실수로 떨어져 놓고 잠시 그 충격에 놀랐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죽었나 생각이 들 즈음 다람쥐는(다람쥐라고 믿고 싶습니다) 펄쩍 공중으로 뛰어올라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냅다 달려 나갔습니다. 죽은 주 알았던 애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니 심장 떨어지는 주 알았습니다. 다람쥐도 나무에서 떨어지는군요!



길리 트라왕안에는 요일별로 유명한 바가 있습니다. 저희는 섬에 먼저 도착해있던 비카를 따라 Sama sama라는 레게 바를 먼저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앉을자리도 없었습니다. 라이브 밴드가 부르는 레게 음악을 들으며 빈땅을 마시다가 같은 라인에 있는 Ziggy bar 등 다른 유명한 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세상에 낮에는 그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섬이 밤이 되니 어디서 몰려온 건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IMG_4046.JPG 레게 바 Sama Sama


한창 신이 났을 무렵 갑자기 노래가 뚝 끊겼습니다. 설마 했는데 다른 가게도 모두 마찬가지로 12시가 되면 모든 가게가 노래를 꺼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강제로 영업을 정지해야 한다니 신기해하며 밖으로 나온 순간 웃음이 터진 게, 몰려나온 사람들이 밖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아까는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던 해변가에는 어느새 스피커와 조명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섬 전체가 들썩이는 걸 보며 이비자가 따로 없구먼 생각하다가 먼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무슨 정신인지 다음날 해장하겠다고 컵라면을 사서 품에 안고 왔습니다. 한 열 번을 떨어뜨렸더니 비카가 걱정이 되었는지 제 방까지 잘 찾아가는 걸 봐줬고 '아 내일 죽겠구먼' 하며 빙글빙글 도는 방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야외 클럽이 된 해변가


한두 시간 되었나 죽음 같은 잠을 자고 있는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이 코란 읽는 방송이 섬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이시여! 옆 침대에서도 고통스러운 뒤척임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지인들이 개운하게 일어나는 새벽시간, 밤새 논 여행객들은 코란 읽는 소리에 마치 엑소시즘을 당하는 듯 고통받았답니다.





길리는 세 개의 섬이 있지만, 그중 길리 트라왕안이 가장 가게도 많고 밤문화가 발달했고 길리 에어와 길리 메노는 훨씬 작고 조용합니다. 더 작은 섬인 길리 메노로 옮길 때 숙소 직원이 ‘거긴 음식점 두어 개 말곤 아무것도 없을 텐데…’하며 왜 굳이 거기까지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걱정해주었지만, 이미 작은 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저는 자비에와 함께 아침 일찍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누사 렘봉안 즈음부터는 섬의 크기가 너무 작아 배에서 내릴 때 바지를 걷어붙이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짐을 머리에 든 채 바닥에 산호 껍데기들을 지압 패드처럼 살살 밟으면서요. 길리 에어는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원래 배에서 내리면 수많은 호객꾼들이 교통수단과 숙소를 제안하는 게 익숙했는데, 예약해둔 호스텔로 걸어가는 동안 마차를 끄는 사람 한 둘을 빼곤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자비에가 어찌나 현지의 '말'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이골이 나있는지 알고 있어 탈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 더위속에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마차에 짐 싣고 사람 싣고 계속 달리게 하는 게 잔인하다는 게 요였습니다. 듣고 보니 말들이 하나같이 제 컨디션이 아닌 것 같아 저 역시 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Karma is...

그렇게 부지런히 짐을 지고 걸어가는 길에 Karma beach라는 표지판을 보고 웃었습니다.

* Karma 업보: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했을 때 쌓여서 나에게 돌아올 나쁜 일


호주에서 친구들과 나쁜 일이 되돌아올 때마다 Karma is a bitc*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비슷한 어감으로 이름 지은 해변을 보니 귀여웠습니다. Karma는 bitc*가 아니라 해변이었네요. 네, 모쪼록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이렇게 작은 섬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겠네요.



저희 숙소는 Eco Hostel로 친환경적인 디자인이 특징인 곳이었습니다. 아기 고양이들 세 마리와 어미가 늘 쫑쫑쫑 쫓아오는 마음 행복한 곳이었죠. 부엌으로 들어가도 쫑쫑쫑 테이블에 앉아도 쫑쫑쫑. 기본적인 모든 골격이 흙바닥 위에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샤워실조차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고 화장실도 쓰고 나면 비료(?) 같은 것을 투척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 화장실 시스템을 듣고 식겁해서 며칠 가지 않다가 배가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이러다가 가스 왕 또도가스가 되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지만요. 심지어 식수조차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는 작은 섬에서 좀 불편해도 유난 떠느니 차라리 자연인이 되어보자 싶었습니다. 숲 속에 모기장이 쳐진 게 다인 침대가 정글로 캠핑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물론 불편할 때마다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말도 안 돼'라는 표정을 볼 때마다 자비에가 깔깔 웃었습니다. 다들 어찌나 물 묻은 흙바닥도 맨발로 잘 밟고 다니는지. 그렇게 무심하고 싶었지만 쉽진 않았습니다.


모기장이 벽이었던 방

*아래는 북킹닷컴에서 찾은 숙소의 사진입니다.

99961693.jpg
90244449.jpg 하늘이 훤히 보이던 대나무 샤워실. 벌 두 마리씩은 들어있었습니다.
91976748.jpg 아깽이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리둥절했던 게, 해변가에서 사롱(허리에 두를 수 있는 긴 천)을 파는 상인이며 액세서리를 파는 상인이며 눈만 마주치면 커플이냐 묻길래 이상하다 했습니다. 숙소에서도 저와 자비에는 분명 1인실로 각자 방을 잡았는데 커플용 방갈로를 안내해주지 않나. 짐에 짓눌려서 헉헉 높이 올라 간 방이 나무 위에 숨겨진 굉장히 로맨틱한 공간인지라 “저희 1인실로 했는데…”라고 말했더니 그제야 직원이 당황하며 1층에 있는 공개되어 있는 편한 방으로 바꿔 알려주었습니다. 다른데선 그러지 않았는데 유독 여기만 왜 이러는지 궁금해했는데 알고 보니 길리 메노가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길리 메노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저자가 이혼을 앞두고 가장 힘든 시간에 홀로 머물며 생각을 정리하던 섬으로 소개됩니다. 나중에 모든 여정 끝나고 연인 펠리페와 다시 한번 가는 섬이죠. 영화에서는 펠리페가 단둘이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는 섬으로 나오고요.


혼자 있자면 정말 끝없이 혼자 있을 수 있고 연인과 온다면 섬에 단 둘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길리 메노는 한 시간이면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적도 위의 동그란 섬입니다. 저희 숙소는 섬의 동쪽에 있었는데, 해 질 녘이면 섬을 가로질러 맞은편 서쪽 해변에 있는 음식점에서 해지는 것을 보며 맥주를 한잔 하곤 했습니다. 석양을 놓칠까 발을 동동 구르며 흙길을 걸었는데도 10분도 안돼 섬 반대편으로 가로지르기도 했습니다.


석양을 놓칠까 해변으로 달려가던 길에


첫날 정말 아름다운 석양을 보았습니다.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에서 볼 듯한 환상적인 색감의 세계였습니다. 어릴 때 세일러문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만화영화 특유의 색감이 어찌나 독특하게 예쁜지 모릅니다. 이 미스터리 한 소녀감성에 빠진 분은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이 색의 제품을 보면 사야만 하는 분들도 꽤 계실 겁니다. 꼭 기적의 세일러문이 튀어나올 것 같은 연보라와 핫핑크의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길리 트라왕안에선 불이 하나 둘 씩 밝게 켜지더니 해변 전체가 일렁이는 게 밤문화가 시작되는게 보였습니다.


IMG_4117.JPG 예쁘게 매달려 있는 달이 포인트 입니다.
반대 편에 보이는 섬이 길리 T입니다. 오른쪽에 UFO처럼 생긴 게 모스크 사원.


저녁을 먹고 저희는 숙소 쪽으로 해변길을 따라 걸어왔습니다. 사방이 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데 발밑은 푹신한 모래라 후레시를 하나 키고 걷는데 발가락 틈으로 모래가 푹푹 빠졌습니다. 파도 소리는 섬 전체를 사방에서 끌어안고 까만 하늘 위는 아득한 별천지였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해변가 가로등 아래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던 현지분들도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 같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자비에가 어머니와 영상통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가족과 통화를 하는 아들이었고 저는 정반대로 연락을 통 하지 않는 딸이었습니다. 갑자기 자비에가 핸드폰을 들이밀며 인사를 시켜줘 얼결에 인사를 했는데, 생각해보니 적어도 인사 정도는 불어로 해주는 게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데 전화를 끊기 전에 한번 더 인사를 하라는 듯 그가 휴대폰을 들이밀었습니다. 이번엔 불어로 굿바이를 하리라! 란 일념으로 자비에가 마지막에 한 인사를 재빨리 따라 했습니다.


“쥬뗌!”


그가 웃음을 푸하하하 터뜨리며 전화를 끊고 주저앉아 물었습니다 쥬뗌이 무슨 뜻인지 아냐며. “굿… 굿바이? 아녀?” 하니 “사랑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더군요. 아 저는 그렇게 친구 어머님께 초면에 사랑한다고…. 그저 싹싹한 애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폭포처럼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부지런히 털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쥬뗌므, 쥬뗌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습니다. Bye는 그냥 Bye라고 한다네요. 이런.


석양을 기다리며
IMG_4140.JPG
IMG_4145.JPG
낮에도 먹고 밤에도 먹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길리 메노에서는 마음에 드는 가게의 빈백에 누워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끊임없이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씻기 위해 숙소로 갔다가도 다시 해지는 걸 보기 위해 같은 가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가게 수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그곳이 적당히 수수한 게 마음이 편안했고 해지는 것 보기에도 최고여서 머무는 내내 단골가게가 되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바다 외에는 주의를 분산시킬 게 없어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고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평화가 함박눈처럼 쌓였을 때, 코모도 아일랜드로 떠나기 위한 아침이 밝았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