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모로코의 사프르(Travel) - 02. 반짝이는 지중해와 대서양
모로코의 티플렛(Tiflet) 시골마을에 살던 어느 날,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던 무료한 일상에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있던 때, KOICA에서 준 배낭과 모자를 챙겨 무작정 바다로 떠났다. 이것이 나의 첫 모로코 여행이었다.
아침 9시. 첫 모로코 여행을 잔뜩 기대하며 모로코에 온 둘째 날 샀던 커다란 지도를 펼쳐들고, 첫 번째 목적지인 케니트라(Kenitra)로 향했다. 불어를 연습해보겠다며 입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데리자(모로코식 아랍어)를 꾹 참고, 길을 물어물어 예술가의 도시 아실라(Ashilah)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기차는 3시간 후인 1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한단다. 하는 수 없이 붕 떠버린 3시간을 채우려고, 역 근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수상보트를 발견한 나는 다짜고짜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해변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 아저씨는 해변으로 가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야호!! 다행히도 5DH(650원)으로 해변에 가는 그랑 택시가 있었고, 그렇게 일정에 없던 케니트라(Kenitra) 해변에 도착했다.
그랑택시에서 내려 바다소리, 바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바다의 짠 냄새가 코로 들어오고 피부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뭔가에 홀린 듯 나는 바닷가로 향했고, 신발에 모래가 넘쳐 벗겨질 때까지 바다로 질주했다.
벗겨진 신발을 두 손에 들고 바다에 발을 담구니,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했다. 라마단 기간이라 사람들도 적고, 주변이 조용했지만 신이 난 나는 카메라 삼각대를 모래사장에 꽂아 놓고, 연신 기쁨의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한참 찍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몸에 ‘王(왕)’ 자가 없는 사람은 중년의 아저씨들뿐일 정도로 서핑하는 모로코 소년들 모두 몸짱이었다. 그 소년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할까 하다가 일이 커질 것 같아 금방 마음을 접었다. 항상 일은 의도하지 않게 커지는 법이니까. 아무쪼록 바다를 코앞에 두고 발만 담구는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그래도 해변에 앉아 파도소리를 음악 삼아 생각에 잠기는 것도 꽤 평화롭고 즐거웠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케니트라(Kenitra)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2시간을 달려 드디어 아실라(Assilah)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와 저 멀리 하얀 요새들이 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닷가로 달려갔다. 바다냄새를 맡으며 낭만을 만끽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모래사장 저 끝에 낙타 한 무리가 보였다. 모두 12마리 정도는 되는 듯했다.
모로코에서 처음 보는 낙타에 신이 난 나는 낙타무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니 엄마낙타와 아기 낙타가 꼭 붙어 앉아 입을 오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진을 찍으러 더 다가가자 어미 낙타는 그 오물거리던 입을 씰룩씰룩 움직이며 경계를 하며 소리를 냈다.
“으~~엉 으~~엉”
“알았어. 해치지 않는다고!”
이렇게 사진을 찍으며 낙타와 1m 간격을 유지하며 놀고 있는데, 낙타주인이 다가와 낙타를 탈거냐고 물었다. 사실 가방도 무겁고 해변 끝에 있는 메디나(Medina : 모로코 전통 시장)로 가야해서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10분 정도에 50DH(7500원)이라는 말에 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배낭여행을 하는 자원봉사자 신분은 경제적으로 제약이 많다.
하지만 친절한 낙타주인은 “je peux prendre une photo avec chameau?(낙타랑 사진 찍어도 돼요?)”라는 나의 부탁에 흔쾌히 OK를 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 낙타 옆에 조심스럽게 앉은 모습을 찍어주었다. 그런데 낙타주인이 갑자기 낙타 위에 올라타란다.
어머!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난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낙타에 올라탔다. 그러자 낙타 주인은 잘 자던 낙타무릎을 발로 차서는 낙타를 일으켜 세웠다.
‘우~와 엄청 높다!’
생각보다 키가 너무 큰 낙타 위에서 신이나 입을 짝 벌리고 있으니 친절한 낙타 주인은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자고 있던 낙타를 깨워 사진을 찍는 미안한 마음에 낙타의 이름을 물으니 ‘자밀라(Beautiful)’란다.
‘고맙다 자밀라(Beautiful)! 그리고 이름 모르는 낙타 주인님도’
해안가에서 쁘띠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들어가니, 말로만 듣던 ‘예술가의 도시’ 아실라(Assilah)의 하얀 요새에 도착했다. 이미 이곳엔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외국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신기하게 쳐다보는 이들도 적어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짐을 풀기 위해 호텔을 찾고 있는데, 낡은 종이에 그린 그림을 들고 서서 자신을 ‘아티스트(Artist)'라고 소개하는 청년이 다가왔다. 의심이 가는 청년이었지만 이미 그는 여행객을 상대로 일하는 베테랑인지라, 그와 인사를 하는 순간 난 이미 걸려들었다.
그 청년의 말을 듣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난 그의 안내에 따라 호텔 아니 민박집을 찾으며 그 좁고 좁은 골목길을 돌고 또 돌고 있었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아 빵 조각이라도 흘려야 하나 생각하는데, 골목마다 하얀 벽 위에 그려진 그림들이 또 내 정신을 뺏는다.
집의 모양, 벽에 난 구멍조차 그림의 일부로 이용한 작품들을 감상하랴, 가이드 청년의 정신을 빼놓는 설명을 들으랴, 민박집 상태를 확인하랴 안 그래도 정신 놓고 구경하는데 아예 혼이 나간 듯 머릿속이 멍해져 버렸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스페인 집, 프랑스 집을 돌고 돌아 난 결국 온 몸이 땀범벅이 된 후에야 바닷가에 위치한 3층의 작은 하얀 방으로 결정을 했다. 관광객이 많고, 하얀 요새 안 에 있는 민박이라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250DH/37,500원)을 불렀지만 어쩌겠는가.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과 풀린 다리는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는 것을.
작지만 바닷가와 가까운 점이 맘에 들어 얼른 무거운 짐을 풀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경하러 나섰다. 하얀 벽과 푸른 바다, 골목골목의 운치 있는 배경 속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을 찾아 감상하는 것은 ‘보물찾기’처럼 무척 설레고 흥미진진했다.
이곳은 매년 8월이 되면 마을 벽을 모두 하얗게 칠하고, 프랑스, 스페인, 남미 등 세계 각 지역의 예술가들이 찾아와 벽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축제’가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었다. 덕분에 이 작은 마을은 유명한 관광도시가 되었고, 몰려드는 관광객 덕에 마을 사람들도 민박, 상점,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그에 따른 소득과는 반대로 그들의 인정과 순수함이 사라진 듯 느껴진 점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상업적으로 어떻게 하면 관광객들에게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하는 모습이었고, 이 모습은 작고 아름다운 마을과 어울리지 않아 씁쓸함이 느껴졌다. 마치 돈과 순수함을 물물교환 한 듯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자연의 이치겠지.
잠시 고민한 나는 다시 여행자로 돌아와 마을 곳곳을 다니며 내 친구 ‘삼각대’를 펴 놓고, ‘10초 타이머’를 맞춰놓고 하얀 벽 속 그림에 들어가 연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모로코 사람들과 유럽인들. 그래도 이곳 현지 주민들은 사진을 찍을 때면 가던 길을 멈춰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등 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깊어 새삼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한참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저 멀리 노을이 보였다. 이제 곧 ‘라마단의 첫 아침식사가 시작 되겠군’ 생각하며, 떨어지는 노을을 감상하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미 많은 유럽인들로 가득 찬 레스토랑에 나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하리라(모로코 전통스프), 마롱 스테이크(생선+감자튀김)를 시켜먹었다. 이동하느라 하루 종일 굶은 터라 이날 저녁은 조금이나마 ‘라마단’을 실행하는 모로코 사람들의 첫 아침식사의 행복감도 느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엔 소화도 시킬 겸 밤 11시까지 마을을 돌아다녔다. 야경도 감상하고, 바닷가에서 밤하늘의 별들도 보며 여행의 첫날밤을 마음껏 즐겼다. 밤 11시까지 거리에 있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늘 저녁 7시가 되면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만 있던 티플렛(Tiflet)생활이었는데, 밤 11시 거리 외출이라니. 그야말로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듯 자유로움이 온몸의 잠자던 세포들을 깨우는 듯 짜릿했다.
어느 순간 아실라(Assilah)의 하얀 벽과 푸른 바다는 노을에 모두 붉게 물들어버렸다. 붉은 노을 속에서 저녁을 먹고, 붉게 물든 골목길을 여유롭게 거닐어 봤다. 낮에 보았던 청명한 모습과는 다른 은은함에 몽환적 느낌이 더해진 골목길은 나를 꿈속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난 마치 새로운 길을 걷는 것처럼 골목길을 걸어 해 질 녘 노을을 보았던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검게 변해버린 대서양을 바라보며,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은은한 붉은 메디나를 바라보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이곳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꼭 함께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그곳의 풍경을 가슴 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아침 일찍 아실라(Assilah)에 있는 그랑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거리에는 아침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그랑 택시비용을 1~2명에게 부담시키고 탕제(Tanger)투어를 하는 그랑 택시 기사들이 많았다. 심지어 호객행위까지.
터무니없는 가격에 놀라 나는 6명 같이 타는 그랑 택시를 타겠다며,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로컬 그랑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6명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꽤 싼 가격으로 도시 간을 이동할 수 있는 모로코의 유용한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아실라(Assilah)에서 탕제(Tanger)까지는 20DH(3000원)으로 4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랑 택시 정류장에서 한 10분 정도 기다리니 6명이 다 모였고, 무사히 6인용 그랑 택시를 타고 탕제(Tanger)로 향했다. 아침 일찍부터 이동하느라 택시 안에서 꾸벅 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탕제(Tanger)란다. 항상 잠에서 깨고 그랑 택시에서 내리면 머릿속이 멍해진다.
‘이곳은 어디? 난 여기 왜? 다음은 어디?’
이렇게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5분정도 지나야 정신을 차리고 내가 여기 온 목적이 생각난다. 내가 도착한 곳은 탕제(Tanger)기차역 옆의 그랑 택시 정류장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다짜고짜 메디나(Medina : 모로코 전통시장)와 해변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낯선 동양인들의 질문에 흔쾌히 길을 알려주고, 안내해주는 모로코 사람들 모두 너무 친절하다. 가끔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지. 이번에도 한 친절한 청년이 쁘띠 택시를 타면 5DH(640원) 정도로 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청년의 말대로 쁘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놈의 오지랖이 문제였다. 택시기사에게 스페인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해변으로 향하던 길을 꺾어 어디론가 올라간다. 맙소사. 이거 또 엉뚱한 곳에 가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데, 아저씨는 메디나의 언덕 위 대포들이 있는 곳에 내려주면서 이곳이 스페인을 보는 가장 전망 좋은 곳이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마치 가이드라도 되는 듯 옛날에 스페인과 전쟁하던 때 사용하던 대포라는 설명도 해주었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엉뚱한 곳으로 갈까봐 걱정했는데, 대포들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와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스페인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어찌나 간사한지.
‘저 멀 리 이 바다 너머가 바로 스페인이라 이거지!’
탕제(Tanger)는 유럽에서 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올 수 있는 아프리카의 최북단이다. 덕분에 유럽인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거리마다 유럽풍의 집과 분위기가 넘쳐났다. 아프리카 최북단 탕제(Tanger)와 스페인의 최남단 알헤시라스(Algeciras)까지는 지브롤터 해협으로 14km의 거리를 두고 유럽과 아프리카로 나뉘어있다.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스페인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과 가까운 거리 덕분에 모로코는 과거 오랜 시간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많은 아픔을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의 왕궁 카스바(Kasbah)와 건물들이 모로코의 관광지가 되어 유럽인들을 상대로 관광 사업을 하고 있다.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영 모르는 일이다.
탕제(Tanger)의 해변을 산책한 후 처음 도착했던 탕제(Tanger)의 그랑 택시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그랑 택시를 타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메디나와 카스바(Casbah)를 보려고, 떼뚜앙(Tetouan)으로 향했다.
모로코 내륙에 위치한 떼뚜앙(Tetouan)은 바닷가를 멀리하고 꼬불거리는 산맥을 넘어서 한참을 들어간 후에야 도착했다. 그랑 택시 정류장에서 내린 후, 바로 옆 유럽풍의 가로수 길을 걷다가 한 무리의 아저씨들에게 카스바(Casbah)를 물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뿅’하고 나타난 한 아저씨!
유창한 영어로 자신이 안내하겠다는 그는 너무나 익숙하게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물으며, 자기가 가는 길을 아니 다음 목적지까지 안내해주겠다며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닌가.
‘이거 이거 또 냄새가 나는데?’
미심쩍은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 친절한 아저씨의 설명에 난 그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스바(Casbah)로 향했다.
아저씨는 떼뚜앙(Tetouan)의 전문 가이드답게 메디나를 들어가면서 부터 줄줄 떼뚜앙(Tetouan)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카스바(Casbah)는 중세에 스페인이 지배할 당시 스페인의 성채로 만들어졌고, 모로코 사람들은 그 당시 저 성채 주변에 있는 메디나 성벽 안에서 살면서 저녁이 되면 상업을 위해 또는 물건을 사기위해 밖으로 나왔단다.
그리고 그 외 대부분 시간은 메디나 안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당시 술을 마시거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메디나 안에서 격리시켜 놓았는데, 그 감옥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게 인상 깊었다. 신기해서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니 아저씨는 지금은 일반인이 사는 곳이라며 어서 오라고 손을 젓는다.
이렇게 30분이 넘게 꼬불거리는 언덕길을 오르고 또 오르자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 오르자 무너져가는 카스바(Casbah)의 성채와 떼뚜앙(Tetouan)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곳은 마치 버려진 폐허 같았다. 무너진 성벽과 쓰레기들. 심지어 주인 없는 양 떼가 “음 메~”하며 성벽 길을 지나가기도 했다. 아저씨는 사람들이 몰래 이곳에 들어와 돌과 무늬가 있는 타일들을 모두 떼어가면서 이렇게 망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타일에 적힌 스페인어만이 이곳이 스페인의 중세 성채였음을 말해 주었다.
실망감과 공허함이 몰려왔다.
30분정도 좁은 골목길을 카스바(Casbah)를 보기 위해 올라왔는데 이게 뭐람. 멋있는 성채를 구경하기는커녕 세계문화유산이 10년 안에 쓰레기더미로 바뀌진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올라왔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려는데, 아저씨는 이 메디나는 모두 7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곳으로 나가든 시내로 나갈 수 있다며 다른 길로 앞장을 섰다. 내려가는 길에는 마을 묘지와 쓰레기더미가 있어 돌아가는 길마저 더욱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카스바(Casbah)를 내려오자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거리가 나타났다. 가이드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하메드 5세 길’이라고 했다.
중세시대의 하얀 벽에 초록색으로 칠해진 건물들과 그 사이를 잇는 알 수 없는 깃발들이 카스바(Casbah)와는 달리 떼뚜앙(Tetouan)의 고상한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저 멀리 메디나와 카스바(Casbah)의 성채도 보였다. 저 높은 곳을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낑낑대고 올라갔다왔다니. 먼 곳에서 카스바(Casbah)를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웠다.
가이드 아저씨는 땀을 흠뻑 흘리는 나를 보더니 빵과 주스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자, 이제 늘 그렇듯 아저씨의 노고에 값을 치러야 할 때가 왔다. 라마단 기간이라 아저씨는 해가 떠있는 동안 물 한잔도 못 마시니, 내가 먹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 아저씨에게 돈을 드리고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자신이 7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라며 돈을 받아서 아이들의 음식도 사야하고 학교도 보내야 한다며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했다. 아저씨가 너무 성의 있게 설명도 해주셔서 안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아저씨에게 “얼마를 원하세요?”라고 물었더니 100Dh(15000원)을 달라고 했다. 모로코에서 꽤 큰돈이었지만.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드릴게요.”
라며 흔쾌히 드렸다. 아저씨는 즐거운 여행되라며 다시 보자는 ‘인샬라(하늘의 뜻)’ 인사를 하고 유유히 사라지셨다. 정말이지 갑작스레 만난 아저씨 덕분에 유익한 시간이었으니. 정말 ‘인샬라’다.
그렇게 아저씨와 헤어진 후 빵과 주스로 간단히 허기진 배를 달래고는 다음 목적지인 파란나라 쉐프샤우엔(Chefchaouen)으로 가기위해 떼뚜앙(Tetouan) 중심가(Central vile)로 나왔다. 중심가에는 늘 원형의 분수대가 있어 어딜 가나 중심가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슬람이 99.9%인 모로코에 커다란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역시 스페인의 통치 당시 함께 들어온 가톨릭의 잔유물이란다. 정말이지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모로코다. 중세의 건물에서 생활을 하고, 장사를 하고, 그 건물을 통해 관광 사업까지 하니. 이 오래된 건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타임머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떼뚜앙(Tetouan)에서 그랑 택시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남쪽으로 달리자 드디어 파란나라 쉐프샤우엔(Chefchaouen)에 도착했다.
‘아~떨린다.
눈앞에 스머프 마을이 펼쳐져 있겠지?
드디어 스머프 마을을 보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잔뜩 들뜬 마음으로 그랑 택시에서 내렸다. 하지만 파란색은커녕 내륙 지방 특유의 사막 공기는 너무 덥고, 생각보다 너무 작은 산골 마을이어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아침부터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카스바(Casbah)를 올라갔다 왔더니 피곤함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풀려가는 다리를 겨우 이끌고 메디나(Medina) 근처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다행히 깨끗하고 저렴한 가격(100Dh/15,000원)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그리고 그만 한 시간 정도만 눈을 붙인다는 것이 3시간을 내리 자버렸다.
해지기 전에 메디나(Medina : 모로코 전통시장)에 가야하는데 큰일이었다. 잠결에 서둘러 준비를 하고, 파란 나라 메디나에 들어갔다.
‘우~와! 이럴 수가! 메디나의 밖과 안이 이렇게 다르다니.’
메디나 밖에서는 작은 산골마을이라며 실망했었다면, 메디나 안은 오래된 골목들이 청초한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스머프 마을’ 같은 자태로 나를 감동시켰다. 골목길은 그냥 찍어도 그 자체가 엽서였다.
게다가 그 좁은 골목위로는 기념품을 파는 작은 상점, 레스토랑, 현지 주민들 집, 작은 갤러리 등이 늘어서 있었다. 파란색의 좁은 골목길을 거니니 마치 내가 엽서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라면 정말 스머프들이 살지도 몰라.’
라며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릴 만큼 파란 나라 쉐프샤우엔(Chefchaouen)은 나를 매료시켰다.
쉐프샤우엔(Chefchaouen)은 유대인들이 초록색으로 벽을 칠해 살았던 곳인데, 1930년대부터 아랍인들이 들어와 벽과 집을 파란색으로 칠하면서 파란색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 마을은 우연히 시작된 ‘파란색’ 하나로 커다란 관광도시만큼 관광업이 발달해있었다.
덕분에 ‘라마단’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메디나 길과 고즈넉한 광장의 레스토랑엔 유럽인들이 북적거리며 밤이 깊도록 파란도시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특별한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메디나 광장에 있는 많은 레스토랑 중에서 보라색 비단이 깔린 테이블에, 촛불을 켜서 한껏 모로코풍의 은은함을 연출한 레스토랑을 골라 앉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메디나의 은은함이 잔잔히 퍼져나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생선요리와 양고기를 다져서 뭉친 바비큐 요리를 시켰다. 내가 살고 있는 모로코 티플렛(Tiflet)에서는 생선을 먹기가 쉽지 않아서 여행을 하면서부터 매번 저녁을 시킬 때마다 생선요리를 먹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여행자의 자유를 만끽하며 유럽인들의 북적거림 속에서 분위기에 취해 어느 때 보다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배도 부르겠다. 분위기도 좋겠다.
이제 슬슬 메디나 구석구석을 다니며 구경해 볼까?’
포만감을 느끼며 분위기 있는 메디나 골목골목을 또다시 거닐었다. 좁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는 동내 꼬마들이 모여서 숨바꼭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관광객이 지나가든 말든 서로 숨느라 야단들이다. 쉐프샤우엔(Chefchaouen)은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지 메디나도 작았다. 덕분에 안 가본 길 없이 구석구석을 다녔고,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는 말도 체험 할 수 있었다. 낯선 길을 따라가더라도 결국 커다란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나라 덕분에 한국에서 가져온 파란원피스는 한 번도 못 입고 한국가나 했는데, 이곳에서 제 빛을 발휘했다. 내가 살고 있는 티플렛(Tiflet)의 시골마을에서는 반바지도 입지 못하고, 원피스라도 입는 날에는 그 시선들에 따가워 죽을지도 몰라 절대 시도하지 못했는데, 이곳은 관광지니 무슨 상관이랴. 에헤라디야!
이런 저런 메디나구경, 사람 구경도 하며 사진을 찍다가 맘에 드는 커피숍에 들어가 카페오레를 한잔하며 깊어가는 쉐프샤우엔(Chefchaouen)의 밤을 만끽했다.
다음날 아침, 쉐프샤우엔(Chefchaouen)에서 CTM버스를 타고 모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페즈(Fez)로 향했다. 모로코의 버스는 지역 로컬버스와 CTM 버스가 있는데, CTM버스가 로컬버스보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훨씬 깨끗하고 에어컨도 설치되어 있어 장거리 여행에 적합하다.
쉐프샤우엔(Chefchaouen)에서 페즈(Fez)까지는 CTM버스로 5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그 길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과 더운 사막 공기로 이어진 길고 긴 여정이다. 단지 길 가의 올리브 나무들만이 길고 긴 여정의 시간을 달래줄 뿐이다.
5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페즈(Fez)에 도착한 후, 다시 쁘띠 택시를 타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 공장이 있는 페즈(Fez) 구 메디나로 향했다.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이 도시 속에 좁은 메디나 길은 현지인의 안내 없이는 100% 길을 잃고 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로이다. 이는 중세시대 부족 간의 전쟁이 빈번했던 때에 적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페즈(Fez)의 메디나에서 가장 유명한 세계적 고대 가죽공장 ‘테너리’로 가기 위해서는 이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정말 이 골목 저 골목이 너무 좁고 복잡하게 만들어져있어 혼자 용기 내어 들어갔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메디나 입구에 있던 한 현지인 소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살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년은 흔쾌히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 소년의 안내를 따라 골목골목을 돌아 한참을 들어가니 골목 끝에 작은 가죽가게가 나왔다. 그 가죽가게를 통해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가자 사진에서만 보던 동그란 통 속에 여러 가지 색으로 가죽을 염색하는 가죽공장이 나타났다.
꼬불거리는 고대의 미로 속에서 드디어 12세기 페즈(Fes)의 가죽공장을 보는 영광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도 잠시 천연 염색재료와 동물의 배설물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암모니아 냄새가 독하게 코를 찔렀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소년이 건네 준 민트향으로도 역부족이었다.
그 독한냄새를 맡고서야 왜 옥상에 올라가기 전에 그 소년이 민트를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가죽을 염색하던 방식 그대로 염색을 하고 있는 장인들을 바라보니,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12세기에 사용하던 방식 그대로를 유지하며 세계에서 제일 좋은 가죽을 염색하는 곳 페즈(Fez). 그곳에선 가죽에 붙은 털을 제거하는 사람, 가죽들을 물레방아 속에 넣어 물로 씻는 사람, 동그란 통속에 색을 넣고 가죽을 발로 밟으며 염색을 하는 사람, 염색이 된 가죽을 양지 바른 곳에 잘 펴서 말리는 사람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를 유지하며 가죽을 염색하고 있었다.
소, 양, 낙타 등 동물의 가죽을 모아 털을 벗기고, 자연속의 천연재료를 이용해 염색을 하는데 심지어 동물들의 배설물을 이용해 염색을 한단다. 잘 염색된 가죽들은 뜨거운 아프리카 태양아래 건조되고, 이들은 세계 각국의 유명 브랜드 가죽의 재료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은 어떤 기계도 없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좀 더 빠르게 작업을 하기 위해 기계화, 자동화 되어 가는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곳에선 천천히 그리고 평화롭게 가죽들이 사람의 손을 타며 염색이 되고 있었다. 내가 갔던 때에는 작업이 많지 않아서 사진에서만 보던 알록달록한 가죽공장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12세기부터 진행된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 세월의 가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최첨단의 시설 없이도 세계에서 최고가 된 페즈(Fes)는 심지어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란다.
정말 대단한 도시가 아닐 수 없다.
페즈(Fez)를 빠져나와 메크네스(Meknes)로 가는 길에는 고대 로마 도시 볼루빌리스(Volubilis)가 있다. 양쪽으로 까마득히 올리브 나무가 촘촘히 박혀있는 거리를 지나 황량한 벌판에 내리자 저 멀리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 법한 관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대 로마양식의 기둥과 계단, 미로형태의 작은 고대 도시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와!! 그야말로 말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탄하고 말았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감탄사로도 이 위대하고 거대한 역사와 문화의 한 장면을 표현할 수 없었다. 고대 로마의 한 도시가 그대로 살아 있는 곳 볼루빌리스(Volubilis).
역사가 남긴 유적들과 더불어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들은 그야말로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했다. 내 발 아래 있는 돌 하나하나마저도 고대 로마시대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고대 로마시대 때 그대로란다.
고대 로마 시대의 수로들은 도시의 곳곳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수로들이 모이는 곳에 있는 커다랗고 둥그런 목욕탕은 고대 로마 정치인들이 모여앉아 정치를 논했던 곳이란다. 그뿐이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돌로 모자이크 해놓은 박물관도 있었다. 그 모자이크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눈을 아무리 비비고 보아도 믿기 힘들었다.
정말 와보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감동과 감격이었다. 보수되지 않은 역사! 시대가 변화하면서도 유지된 그 문화와 역사는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비록 부서지고 무너졌지만 돌멩이 하나까지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 옛날에 얼마나 큰 도시였었는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들어온 것처럼 들뜬 나는 그 멋진 풍경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사방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찍는 것 마다 엽서사진이 되는 볼루빌리스(Volubilis)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던 고대 역사 도시 메크네스(Meknes)의 볼루빌리스(Volubilis)를 마지막으로 4박 5일의 지중해와 대서양을 품은 모로코 역사탐방은 끝이 났다.
중세시대의 건물들과 조상들의 생활방식 그대로 생활하는 모로코 사람들의 모습은 나를 그 당시의 세계로 이끌었고, 지중해와 대서양의 탁 트인 바다가 주는 자유로움과 상쾌함은 나의 몸과 마음까지 정화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여행 속에서 만난 친절한 모로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모로코를 더욱더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 짧지만 달콤했던 4박 5일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