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원칙적으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에게는 다른 외계 행성 존재와의 사랑이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은하 히치하이킹에 관한 은하위원회의 결의안"에 따라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에게는 무제한 무전 은하 여행의 특전이 주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그만큼 엄청난 <안내서>의 광고 효과를 노린 다행성적 기업들의 적극적 후원과 로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기업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안내서>의 중앙 편집위원들이 이동조사원들의 행성 간 연애를 금지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막대한 예산으로 운영되는 이동조사원 시스템인데 이동조사원들이 사랑에 빠져 자신들의 임무를 게을리하고, 거기다가 사랑 때문에 행성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잃는 순간, <안내서>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동조사원들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초 은하적 역마살을 타고나서 은하 히치하이킹 자체를 무슨 신앙적 행위처럼 생각하는 족속들인 이동조사원들은 처음엔 대체로 중앙편집위원회의 결정에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당신네 지구인들도 그렇지만 여행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어떤 여행지에서 만난 존재와의 관계 맺음을 제외하고 어떻게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과정에서 연애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두 명씩, 사랑에 빠진 이동조사원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그 수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중앙편집위원회는 이동조사원의 자격을 박탈하고 앞의 그 특전까지 회수해 버렸다. 하지만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동조사원들이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자유로운 연애를 인정해 달라며 파업 아닌 파업을 벌이고 <안내서>와 "히치하이킹 링"을 반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생명과도 같았던 <안내서>의 업데이트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더 이상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는 <안내서>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오히려 다행성적 기업들이었다. 전 은하적 차원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인 <안내서>의 광고 효과가 떨어지니 매출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전무후무한 이동조사원 총회가 소집되었다. 당연히 기업 대표들과 중앙 편집위원들의 설득은 실패로 끝났고 이동조사원들의 자유연애는 승인되었다. 단, 연애 대상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길 것과 혹시 신분이 탄로 날 경우엔 그 행성을 떠날 때 자신과 관련한 대상자의 기억을 삭제해야 된다는 단서를 달고 말이다. 물론 그 대상자가 무한 불확정성의 확률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이 된다면 함께 은하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다는 단서도 붙었다. 이후 "victory of love (사랑의 승리)"로 불리어진 전설적인 그 날의 집회 이후 이동조사원들은 자유롭게 행성 간 히치하이킹과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들과 중앙편집위원회의 걱정과 달리 <안내서>의 업데이트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고, 그 내용은 훨씬 더 풍부해지게 되었다. 결국 지금처럼 전 은하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하지만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사랑이 넘치는 매체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 역시도 그 날의 그 감동적인 승리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승리" 이후 첫 번째로 도착한 항성계 H 시스템의 3번째 행성인 이곳 지구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