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16
"선생님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그녀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헝클어지긴 했지만 짧은 금발머리에 유난히 큰 눈, 분명 한국인이었지만 낯선 얼굴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와락 끌어안았다. 10년 전에 헤어진 연인을 제외하고는 여자를 안아보지 못한 나는 엉거주춤 그녀를 안았다.
심지어 그것은 내 방 안이었다. 침대 위엔 불면에 시달린 지난밤의 흔적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이불처럼 남아 있었고, 책상 위엔 몇 년을 끌어온 되지도 않는 소설의 흔적이 노트북 모니터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이룰 가망마저 없어져 버린 유럽 여행의 꿈을 달래주려는 듯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 러그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까칠한 얼굴, 며칠 동안 감지 못한 머리 때문에 냄새도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몇 년 만에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나를 안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스물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그녀를, 40대를 훌쩍 넘긴, 그래서 이제는 홀아비 냄새마저 풍기기 시작한 내가 알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누군가를 가르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가까스로 그녀를 떼어놓으며 물었다.
"그것보다 먼저 먹을 것 좀 없어요? 아, 맞다. 라면, 혹시 라면 없어요?"
"아니, 아가씨. 도대체?"
"저기요.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 일단 라면 있으면 하나 끓여주세요. 정말 배가 고파서 그래요. 두 개면 더 좋구요."
눈을 보니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그런지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방을 나와 역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부엌 바닥을 맨발로 가로질러 설거지 거리가 가득 찬 싱크대 위 선반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유통기한이 남아있는 라면이 몇 봉지 있었다. 일단 설거지부터 해야 될 것 같았다. 방 안에서는 뭔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였을까? 어쨌든 상관없었다. 일단 라면을 끓여주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보면 될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녀는 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녀의 소원대로 라면 두 개를, 계란까지 넣고 끓여서 대령했을 때였다. 약간의 때가 앉은, 거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까지 약간 나는 내 베개에 볼을 대고는 쌔근거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 옷차림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여태 사각팬티에 반팔 티만 한 장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옷장에서 체육복 바지를 꺼내 주섬주섬 입었다. 그때였다.
"제가 얼마나 잤죠? 미안해요. 너무 피곤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한 30분 정도? 일단 라면부터 먹어요."
그녀는 어느새 씩씩하게 일어나 소파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세수도 안 한 상태였던 것이다.
"고마워요. 나트륨이 부족했거든요. 자, 이제 물어보세요. 모두 대답해 드릴 테니까."
세수를 하고 양치질도 하고 머리까지 감고 나오니 그녀는 설거지까지 마쳐 놓았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황당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당신?"
"전 C대학교 대학원생, M이라고 해요. 박사과정이구요."
"그런데 왜 나를? 아니 날 어떻게 아세요?"
"제 전공이 고전문학이거든요. 학위 논문 준비 때문에 왔어요."
"그럼,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
"아뇨, 상관있어요. 제 논문 주제가 선생님이거든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난 그냥 이름 없는 소설가 지망생일 뿐이다. 물론 나도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대학원을 나온 것도 아니고 학부 졸업 논문이라고 해 봐야 현대소설 작가 작품론을 짜깁기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세계적 명문인 C대학교 대학원생의 박사 과정 논문 주제가 '나'라니 말이 되냔 말이다. 그것도 고전문학 전공자가 말이다.
"아뇨. 분명히 제 논문의 주제는 선생님이에요."
"이봐요, 아가씨. 장난치는 거라면 그만둬요. 아니, 혹시 돈이 필요해서 이러는 거라면 번지를 잘못 찾았어요. 보다시피 난 가난뱅이 작가 지망생일 뿐이니까."
약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을 만했다. 그동안 출판사 관계자들로부터 숱하게 받은 모욕에 이골이 나기도 했으니까 이 정도의 놀림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미, 타디스, 사과 1, 사과 2, 미학적 로봇, 소금인형, 벚꽃엔딩, 슬픈 은하... 모두 쓰신 작품들 아니에요?"
순간 나는 책상 위에 아직도 켜져 있는 내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것들은 아직 출판사에도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작품도 있었다. 약간 소름이 돋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 노트북 뒤져본 게 아니니까요."
하긴 그랬다. 그녀가 가짜로 잔 게 아니라면 노트북을 뒤져볼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고 그녀는 정말 피곤한 듯 보였다.
"장난 그만해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말씀드렸잖아요. 전공이 고전문학이라고."
"참나, 이봐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돌리지 말고 말해요.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뇨."
“알아요, 저도. 그런데 먼저 하나 약속해 주세요.”
“약속이라니 무슨?”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꼭 믿어주셔야 해요. 그러니까 미친 사람 취급하며 쫓아내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구요. 미친 사람 취급은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니까.”
“알았으니까 말해 봐요. 도대체 당신 누구요?”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방바닥을 응시했다. 예쁜 얼굴이구나. 어이없게도 그 상황에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제가 지금부터 200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면, 믿겠어요?”
당연히 믿을 수 없지. 내가 비록 SF랍시고 되지도 않는 소설이나 긁적이고 있는 작가 지망생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시간여행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그리고 애초에 나에게 꼭 믿어 달라는 다짐을 받았다. 우선은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내 태도를 결정하기로 했다.
“계속 말해 봐요.”
“전 2189년 생으로 2214년 현재 25살의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에요. 아, 참. 박사 과정 치고는 어리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석사 과정이란 게 없어진 지 이미 100년은 훨씬 지났으니까. 말씀드렸듯이 전공은 고전문학이고 제 논문 주제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에 선생님을 찾아온 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녀는 오히려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계속 말해요.”
“이해가 안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미 국문학이란 개념이 없어졌어요. 물론 고전문학 연구자들 중 일부는 희미한 국문학의 맥을 잡아내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실은 국문학이란 게 존재할 당시에 대한 국문학 연구사일 뿐이구요. 글을 쓰는 즉시 200여 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국문학은 더 이상 의미가 없죠. 각국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도 혼란스러워진 지도 오래 되었구요.”
“잠시만, 아가씨. 그럼 아가씨 말대로 국문학도 사라진 그 시절에, 그래서 우리나라도 아닌 저 멀리 유럽에 있는 C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다는 아가씨가 왜 하필 나를, 그것도 아직 한 편의 소설도 발표한 적이 없는 작가 지망생인 나를 찾아왔단 말이오?”
“그게, 말하자면 약간의 기술적 오류 때문이었어요. 타임라인을 설정할 때 보통의 경우는 자동 윤년 계산 방식을 사용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만 그 기능을 체크하지 않아서 원래 계획보다 조금 일찍 온 것 같아요.”
“이봐요. 아가씨, 누굴 바보로 아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미래에서 윤년 계산을 빼고 왔다면 원래보다 늦게 도착해야지 일찍 온단 게 말이 돼요?”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참고 듣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속에서 모순을 찾아낸다면 더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역시! 맞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역시, 미래에 대한 선생님의 통찰은 대단해요.”
“이봐요. 아가씨,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아요. 기껏 해봐야 중학교 과학 수준의 사고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건 당신 말이 거짓이란 증거니까.”
“네, 네. 사실 제가 약간 기계치라서요. 설명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씀드릴게요. 말씀대로 윤년 계산을 빼버렸다면 선생님의 기준으론 더 늦게 와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200년 후 미래에서 바로 온 게 아니거든요. 지금의 선생님께 오기 전에 몇 군델 더 다녀왔어요. 물론 지금보다 훨씬 과거를 다녀온 것이겠죠?”
어이가 없었다. 너무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아직 나에겐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과거에서 왔다? 그러니까 윤년 계산을 빼서 생각보다 일찍 왔다? 좋아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다시, 나는 아직 한 편의 소설도 발표하지 못한 작가 지망생일 뿐인 건 어떻게 할 거요. 내가 당신 논문의 주제라면 적어도……. 아니, 그럼?”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이 어떤 박사과정 대학원생의 논문 주제가 된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전에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녀의 말을 믿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에요. 원래 계획보다 일찍 와서 생긴 문제이기도 한데, 선생님, 혹시 지금 쓰시는 글 얼마나 남았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면 그렇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눈만 멀뚱 거릴 뿐이었다.
“어느 출판사인지 모르지만 이제 그만하고 가라고!”
고함을 치며 거칠게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떠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완강히 버텼다.
"약속하셨잖아요? 쫓아내지 않는다고."
"이봐, 그건 당신 말이나 들어보자고 한 소리잖아! 동네 창피당하기 싫으면 빨리 가라고."
복도식 오피스텔은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법이다.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지냈던 옆 집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같은 층의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저기 저것 좀 보세요."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있던 팔찌 비슷한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면서 집 안 쪽 내 책상을 가리켰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 정확히 말하면 내 노트북의 키보드 위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성큼성큼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키보드 위엔 내 소설 "사과 2"에 등장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트북의 모니터에서 나온 빛으로 만들어진 3D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이게, 이게, 정말. 이거 당신이 한 거요?"
어느새 그녀는 현관문도 닫고 내 곁에 서 있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이만 꺼야겠어요. 안 그러면."
"잠시만 있어봐요, 아가씨! 이거 정말 믿을 수가..."
그녀가 누구라는 건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홀로그램 나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영상이었다. 이파리 하나하나, 줄기 하나하나까지 마치 살아있는 나무를 줄여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작고 아름다운 나무를 만져보고 싶었다. 검지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만져지지 않는, 영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탁! 하는 느낌과 함께 나무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 이런! 죄송해요, 선생님. 그래서 제가 꺼야 된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너무 신기해하시길래."
"이거 왜 이래요?"
"모니터가 그만 나가 버렸어요. 선생님 노트북이 워낙 구형 LED 모니터라서 억지로 홀로그램을 밀어내려다가 과부하가 걸렸을 거예요."
"뭐요? 그럼 자료들은? 모두 날아갔단 말이요?"
"아, 아니에요. 그건 하드디스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확실해요? 책임질 수 있어요?"
"네, 그건 확실히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
"어떻게?"
우스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가 그녀의 다음 말과 행동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의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스캔해도 될까요?"
"그러든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예의 그 팔찌 비슷한 뭔가를 건드렸다. 그리고 1, 2초 지났을까?
"네, 분명히 선생님 하드디스크는 무사하네요. 당연히 글도 무사하구요. 파일명이 셀레나.hwp 맞죠?"
어이가 없었다. “셀레나.hwp”라니?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내 소설의 파일명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아니, 그전에 그래, 그녀의 팔목에 있는 저것이 미래의 PC라고 가정하자. 그래서 엄청난 속도로, 그것도 무선으로 구형인 나의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스캔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어떤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파일이 내가 쓴 소설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도 하자. 그런데 그것을 그녀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적어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디스플레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의 정체에 대해 조금씩 의심까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눈을 봤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분명 선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아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 정말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그리고 괴물 같은 것도 아니구요."
"잠시만, 아가씨. 내 생각을 알겠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미래에는 눈만 보면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무슨 마법 같은 기술도 생긴단 말이오?"
"네, 그래요."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일종의 통계예요. 선생님 눈의 동공 크기와 안면 피부의 미세한 떨림, 호흡과 심장 박동수, 거기다가 현재의 상황적 맥락과 많은 시간여행자들의 경험치 등 생각보다 수많은 변수들이 반영된 결과랍니다."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있어 봐요."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머리마저 깨질 듯 아팠다. 한 순간 핑하니 어지러웠다. 그때였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나의 뒷목덜미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빠른 손놀림으로 관자놀이와 턱 아래 기관지 부분을 누르더니 손바닥으로 등을 몇 차례 두드렸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 고수같이 날렵한 손놀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흡이 터지더니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분마저 좋아졌다.
"어떻게 한 거요? 아니 그보다 말해봐요. 당신 도대체......"
인간이 맞긴 한 거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저, 선생님과 다름없는 사람 맞아요. 단지 말씀드렸듯이 200년 후에 온 사람이라 선생님께서 아직 모르는 기술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랍니다."
"잠깐만 정리를 좀... 그러니까 시간여행자들이 당신 말고도 더 있다고? 거기다가 내 짐작으로는 그 팔찌 비슷한 PC인지 뭔지 모를 단말기는 당신의 뇌와 무선이나 유선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을 거고. 또 당신의 두뇌 일부는 엄청난 용량을 가진 저장장치 역할도 하고 있을 거고. 그리고 방금 나에게 한 그 기 치료 비슷한 손놀림 역시 당신 뇌에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겠지. 내 말 맞소?"
"역시, 틀리지 않군요. 선생님 통찰력은, 선생님 쓰신 글에서 느낀 그대로네요. 선생님 말씀 대부분 맞아요. 단, 마지막 기 치료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좋아요, 아가씨 말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사실이라고 치는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보셨잖아요?"
"아니, 다 좋다고. 그런데 한 가지 더. 당신이 미래에서 왔다면 말인데, 당신 말고도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더 있다면 왜 그동안 역사나 뉴스에서 한 번도 시간여행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거요?"
"아! 스티븐 호킹의 논리 말씀이시군요. 미래에서 온 사람이 없었으니까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그럴싸하긴 했죠. 그런데 사실은 시간 여행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하면 어떨까요? 수많은 시간 여행자들이 다녀갔지만 사실은 관찰자의 역할만 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고정된 타임라인은 바꿀 수가 없거든요. 그 원칙이 깨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도 소멸될지 모르는 데 과거의 사건에 개입할 시간 여행자는 없거든요. 당연히 시간 여행은 연구 목적으로만 가능하구요. 그것도 실증을 위해서만 허가가 나죠."
"그건 모순이오. 당신이 지금 나에게 말해주고 보여주고 있는 것들은 그 고정된 타임라인을 바꾸는 것이니까."
"아니에요. 만약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벌써 저한테 경고 메시지가 왔을 걸요? 그런데 아직 그런 경고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타임라인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네, 맞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이미 고정된 타임라인의 일부란 말이군. 그것도 전 인류가 궁금해했던 미래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인정해요."
"좋아요. 들어봅시다. 그래, 먼 미래에서, 먼 유럽의 어느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이 아직 소설 한 편도 발표한 적 없는 작가 지망생인 나를 찾아온 이유란 게 뭔지."
그녀는 다시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어요. 좀 전에도 여쭤 봤는데, 지금 쓰시는 소설들 얼마나 남았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그게 왜 궁금하지? 아가씨 말 대로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 언제 완성될지는 이미 고정된 타임라인 속에 포함되어 있을 텐데."
"그게......"
그녀는 몹시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고정된 타임라인에 개입하지 말라는 어떤 경고 메시지가 그녀에게 날아든 것일까? 아니면, 그래, 아니면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게 어떤 경우든 내 선택이 중요하기 때문일까?
"말해요. 난 준비됐으니까."
"좋아요. 말씀드릴게요.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선생님 지금 쓰시고 있는 소설, 책으로 출판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숨이 턱 막혔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보다 비록 훨씬 낮은 확률이라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지금까지 이 소설들을 놓지 못한 이유였다. 그런데, 내 앞에 이미 고정된 타임라인으로 제시된 그녀라는 존재가 그 낮은 확률을 아예 제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말씀드린 대로 선생님의 소설은 선생님 살아 계시는 동안 책으로 출판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출판되더라도 아마 거의 팔리지 않고 잊힐 거예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실망감을 넘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었던 작가라는 꿈이 이제는 영영 가망 없어져 버린 것이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내 게으름과 무능함 탓일 뿐이다.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의문스러웠다.
"그럼, 도,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온 거요?"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아직 다 쓰지도 않은 나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는, 그리고 나의 작품에 대해 연구한다는, 그래서 현재의 내 앞에 나타난 미래의 그녀가 그 의문의 이유였다.
"실망하셨죠? 하지만 선생님, 제가 선생님 앞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전, 말씀드렸듯이 지금부터 200년 후의 미래에서 온 고전문학 연구자이구요. 그게 뭘 의미하겠어요?"
"아니, 돌리지 말고 말해요."
"선생님은 계속 글을 쓰셔야 해요. 그게 제가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구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작가로서 사망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에게 계속 글을 쓰라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읽을 사람이 없는 글을 계속 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냐하면!"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너무 가여워서요."
가엾다니. 그건 또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소린가? 글을 쓸 마지막 희망마저도 빼앗아 버리고서는 이제 와서 가엾다니? 생각해 보라. 불행한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창작을 이어갈 예술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당신, 너무 잔인한 거 알고 있어?"
절규에 가까운, 하지만 무겁도록 낮은 음성의 내 말 때문이었을까?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것은 거짓된 눈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눈물이었다. 나는 엉거주춤 손을 뻗어 탁자에서 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네주었다. 그래도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이렇게 슬퍼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것은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내 글쓰기에 대한 패배감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순정한 호기심이었다.
"선생님, 하지만 정말 선생님은 계속 글을 쓰셔야 해요. 선생님에 대해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예요."
"좋아요. 아가씨, 내가 계속 글을 쓴다고 해요. 그런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그 글이란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거요? 그건 일기나 낙서나 마찬가지이지 않소? 쓰레기 글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내친걸음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고정된 타임라인을 건드리는 것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그녀의 존재와, 그녀의 이야기와, 그녀의 눈물을 통해 나 스스로 깨우쳐야 될 대답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그 대답을 애써 외면하며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쓰레기 글, 아니에요. 선생님 글, 절대 쓰레기 글 아니라구요.”
시뻘게진 눈으로 연신 코를 훌쩍이며 그녀는 더듬더듬 울먹였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어떤 이유를 듣지 않기로 했다.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물 정도면, 그리고 쓰레기 글이 아니라는 그녀의 평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써야 할 게 얼마 남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말대로 계속 글 쓸 테니 이제 그만 울어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
“그런데 아가씨,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어야겠어요. 왜, 나를 찾아온 거요?”
“아! 그건, 사실 선생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닐지도 몰라요. 순전히 제 논문 때문인데, 선생님을 확인하는 게 이유였어요.”
“나를 확인한다니? 그건 무슨? 내 글들이 출판 안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내 작품인지도 모르고 있었단 게 말이..... 아! 그렇군, 그렇군.”
갑자기 머릿속이 훤해졌다. 그랬다.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 그녀가 그토록 나에게 글쓰기를 계속 권한 이유, 모두를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어떤 달콤한 서글픔 같은 게 느껴졌다.
“아가씨, 나한테 오기 전에 더 과거에 다녀왔다고 했죠?”
“네, 맞아요.”
“누구였는지 말해주겠어요? 내 생각에 그 말이 타임라인을 건드릴 것 같진 않으니까.”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물론 타임라인을 검토하는 것이리라.
“두 사람이었어요. 정약용과 빈센트 반 고흐.”
“정약용 선생과 고흐라.... 정말 스펙터클하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하지만 역시 내 예상을 빗나가진 않았네요. 그럼 하나 더. 그분들을 만난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도 있어요?”
“그건......”
그녀는 다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 멈칫거림은 먼저의 그것보다 조금 더 길었다. 물론 타임라인 검토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리라.
“네, 그것도 가능해요. 정약용 선생님을 만난 건 1836년 2월 22일이었어요. 그리고 고흐를 만난 건.”
“1890년 7월 29일!”
“아니, 어떻게 그걸?”
“하나만 더 묻죠. 원래 나한테 오기로 한 날짜는 언제였어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물론 대답할 수 없겠지. 이해해요. 그건 타임라인을 건드리는 거니까. 그건 그렇고, 이쯤에서 정확하게 말하는 게 어때요? 아가씨, 정말 고전문학 전공 맞아요?”
“네, 그건 맞아요.”
“그럼 정약용 선생님과 고흐를 찾아간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란 말이요? 아가씨 말대로라면 그건 금지된 거 아닌가?”
“아뇨. 그것도 연구가 목적이었어요. 물론 개인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겠지.”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확인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정약용 선생님과 고흐를 찾아간 덴 정말 연구 목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연구 주제는 말씀드렸듯이 선생님이 쓰신 글이에요.”
“알았어요. 그만큼이면 충분해요. 아가씬 최선을 다한 거니까.”
그랬다. 그만하면 그녀는 타임라인을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몫이다. 정리를 해 보면 이렇다.
지금부터 200년 후,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그녀는 박사 학위 주제 때문에 네트워크를 검색하다가 혹은 헌책방(그때도 그런 게 있다면)을 뒤지다가 <에피소드>라는 낯선 소설집을 접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는 작가도 작품도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소설집의 이야기들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소설집이 완벽한 판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편의 짧은 소설로 나뉘어 네트워크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애초에 소설들의 길이가 너무 짧았던 탓인지 아니면 워낙 알려지지 못한 탓인지 다양한 형태의 수정과 변형이 가해져 원본을 특정할 수 없는 상태란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민담의 21세기 디지털 버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연히 연구자로서 충분히 다루어 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집, <에피소드>와 작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작가에게 어떤 연민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연민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계도만 그려놓고 눈을 감아야 했던 정약용 선생이나 살아생전 단 한 장의 그림만 팔 수밖에 없었던 고흐에 대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간 여행을 신청하게 된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녀가 시간 여행의 허가를 받았는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그녀 말대로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허가를 받았을 것이다. 더해서 소설집의 언급 덕분에 정약용과 고흐의 시대까지 시간 여행을 허가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먼저 정약용의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836년 2월 22일 죽음을 앞둔 정약용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을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마찬가지로 1890년 7월 29일, 가슴에 총상을 입은 고흐에게 가서 가만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당신의 그림이 온 세상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그렇게 그녀는 타임라인을 건드리지 않는 시간대를 선택했던 것이다. 시간 여행의 마지막 시간대는 당연히 소설집, <에피소드>의 작가였다. 마찬가지로 타임라인을 건드리지 않는 시간대를 선택했을 것이다. 바로 작가가 죽기 직전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녀는 지금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 말대로 윤년에 대한 계산 실수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신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나의 말이 이미 고정된 타임라인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내 상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이야기에 대한 그녀의 태도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고정된 타임라인을 건드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의 존재에 어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생각하신 것이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전 선생님을 믿어요. 선생님이 정약용과 고흐를 사랑했던 것처럼 저도 선생님과 선생님의 글을 사랑했거든요.”
“고맙다고 해야 되겠지?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라니? 어떤?”
“이거 좀 보라고. 이 상태론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없다고.”
나는 모니터가 나가버린 내 노트북을 가리켰다.
“아참! 그렇네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부끄럽지만 워낙 빈털터리가 돼서 당장 노트북을 살 형편이 못 되네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마침 제 타임 모듈 안에 구형 노트북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선생님 노트북을 통째로 동기화하면...”
“그 타임 모듈이란 거 타임머신 같은 건가? 그리고 구형 노트북이라니? 그걸 나한테 주면 그 역시 타임라인을 건드리게 되는 거 아닌가요?”
“타임 모듈은 엄밀하게 말하면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선생님 시각에서 보면 타임머신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릴 순 없구요. 물론 선생님이 타실 수도 없을 거예요. 탑승자가 저로만 한정되어 있거든요. 지금 이 건물 옥상에 있는데 선생님이나 이 시대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구형 노트북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빈티지를 좋아해서 수집해 놓은 건데 지금 시간대와 비슷한 시기의 제품이에요. 그리고 약간 손을 봐 놓아서 성능은 지금 선생님 노트북보단 훨씬 좋을 거예요. 어때요? 하시겠어요?”
“그렇다면야 나야 손해 볼 건 없지. 근데 정말 모든 자료를 동기화할 수 있는 건 맞아요?”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럼 바로 가져올게요.”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그녀를 따르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다는 타임 모듈을 봐서 무엇하겠는가? 잠시 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예의 그 예쁜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거의 최신 제품이나 다름없는, 그녀 입장에선 빈티지인 노트북을 내놓았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이 노트북 말이다.
“이미 동기화는 마쳤어요. 그리고 너무 구형 OS를 쓰시던데 혹시나 필요하실까 봐 색다른 OS도 부트캠프에 숨겨놓았으니 관심 있으시면 써 보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켜 봐도 돼요?”
“물론이죠.”
노트북은 그녀 말대로 정말 빠른 속도였고 내 노트북과 똑같은 상태로 동기화되어 있었다. 물론 “셀레나.hwp” 파일도 그대로 있었다.
“고맙군요.”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마워요. 이제 제 학위 논문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즐거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란 것을.
“아가씨 아직 한 가지 작업이 더 남지 않았어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난 괜찮으니까 하고 싶으면 해요.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이 왔다는 사실이 사라져야 된다는 것 맞죠? 그래야 타임라인이 원래대로 고정될 테니까.”
“네, 맞아요. 하지만 아직 시간은 좀 있어요.”
“그 시간이라는 게 물론 내가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를 말하는 건가요?”
그녀는 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건 최대한 빨리 써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군.”
“죄송하지만 맞아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사실 이제 하나의 에피소드만 남았으니까.”
“그럼 지금 바로 쓰실 수 있어요?”
“물론이지. 2시간만 줄래요?”
그녀는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준 새 노트북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2시간이 되지도 않아 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그녀는 그 소설을 읽어 보더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악수와 함께 나를 한 번 꼭 껴안아 주었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는 예의 그 팔찌 같은 것을 손끝으로 몇 번 건드렸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무언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책상에 앉아 있는 지금 내 눈 앞에는 두 개의 노트북이 있다. 그중 하나는 모니터가 꺼져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노트북에는 내가 쓴 적이 없는 소설 한 편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내 소설집의 제일 마지막에 쓰여 있다. <에피소드>란 제목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