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15
"선생님, 보세요. 올해는 그래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연구원 한 명이 손가락으로 벚나무 가지의 꽃눈을 가리켰다.
"오늘이 며칠이지요?"
"1월 15일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해 보다 이틀 먼저 꽃눈이 나온 셈이었다.
"바실러스 아밀로리퀴파시엔스 수치도 아직은 양호한 편입니다."
"역시.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 이 나무들이 마지막 희망이군요."
그랬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의 모든 벚나무들이 꽃눈 대신 잎눈을 틔었다는 방송 보도가 어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 년 전 백두산 자락에 옮겨 심어 놓은 열 그루 남짓을 제외하고는 우리 연구소의 이 두 그루만 꽃눈을 틔웠다. 말하자면 이 두 그루가 한반도 전역에서 벚꽃이 필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셈이다. 그리고 내 생애 마지막 벚꽃일 것이다.
"저, 선생님."
연구원이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하필 왜 이곳에 연구소를 세웠냐구요? 개화 확률이 높은 중북부지방이 아니라?"
"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마치 젊은 시절의 누구처럼 맑고 선해 보였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어떤?"
"첫째는 과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어요. 잘 알겠지만 원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자라는 벚나무들은 왕벚나무로 제주도가 원산지예요. 덕분에 100여 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약간의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수많은 벚나무들이 살아남았고 수 십 년간 한반도의 봄을 아름답게 수 놓았지요. 그러니 이곳 남부지방의 벚나무들이야말로 원산지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원래의 형질을 가장 많이 가진 나무이며 우리나라의 벚나무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곳 나무들을 연구하는 게 당연했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 가지는, 그랬다. 그것은 아직 한 번도 밝히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밝혀도 될 것이다. 나도 이제 충분히 늙었으니까 말이다.
"이것 때문이에요."
나는 액세스 크리스털의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가상 디스플레이 창이 나타났다. 나는 폴더를 열고 이미지 파일 하나를 터치했다. 그러자 오래된 사진이 한 장 나타났다. 사진에는 2미터 남짓한 두 그루의 어린 벚나무 아래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젊은 시절의 나와 그가 있었다.
꽃이 핀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봄은 항상 벚꽃과 함께 왔다. 삼백예순 날 하냥 모란만 기다렸던 어느 시인처럼 나에게 봄은 벚꽃이 피는 것이고, 벚꽃이 지고 나면 내 한 해는 다 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풋풋한 대학 새내기 때부터 생긴 열병이었다. 스무 살 그 해, 내 기억 속의 봄은 끝없이 이어진 그 벚꽃길과 그 길 옆에 드넓게 펼쳐진 배밭에 머물러 있다. 벚꽃이 그야말로 눈처럼 내리기 시작할 즈음 배밭은 온통 연둣빛을 머금은 하얀 배꽃들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꽃천지, 꽃사태. 스물한 살의 그, 자전거를 타고 그 벚꽃길을 지나 나에게로 왔다. 동아리 회원이 아닌 그가 그곳에 나타났을 때, 내 얼굴엔 수줍은 연분홍 벚꽃 물이 들고 말았다. 어리둥절 바라보는 모두들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빨개진 그,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꽃그늘을 지나온 햇살이 온통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첫사랑이었다.
"선배한텐 항상 햇살이 묻어있는 것 같지?"
수업을 마치고 복도 저 편에서 걸어오는 그를 보고 옆 친구들에게 말했다가 엄청난 야유를 듣긴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 그는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처럼 벚꽃을 좋아했다.
"벚꽃 속에 네가 서 있었잖아."
그렇게 우리는 매년 봄을, 벚꽃 가득한 그 날들을 기다렸다. 간혹 짓궂은 친구들이 우리를 친일파 커플이라며 놀릴 때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왜 벚꽃을 싫어하지? 벚꽃은 그냥 꽃이야.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시게 하얀 꽃일 뿐이야. 일본 꽃 벚꽃, 우리나라꽃 무궁화? 꽃들은 자기들이 어느 나라 꽃이란 사실을 알까? 그렇게 보면 벚꽃, 정말 불쌍하지 않니? 그냥 예쁜 꽃일 뿐인데 말이야."
그랬다. 그는 꽃을 꽃 그대로 사랑했다. 아니 자연을 사랑했다. 학과 지원 동기부터 성적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나와는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가꾸는 나무꾼이 꿈이었다고 했다. 그린피스 같은 환경운동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졸업 후 그는 정말로 그린피스 활동가가 되었다. 그는 아직 지부도 없는 한국에서 그린피스의 정식 활동가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로 그와 나, 헤어져야 했다. 졸업 후 학교 수목원의 연구원이 된 나와 달리 아무 벌이도 없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위험한 일들을 벌이는 그를 나의 부모님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의 부모님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며 우리나라를 떠났다. 물론 나도 그와 함께 떠나고 싶었지만 나에겐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낼 용기가, 아니 의지가 없었다. 뭐가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와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인데.
간간히 보내오는 메일 속의 그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가, 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 러시아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반대 시위에 참여하러 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나타난 대형트럭이 멈추지도 않고 그와 동료들을 덮쳤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렇게 아름다운 그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내 탓처럼 느껴졌다. 죽을 것 같이 아팠다. 아니 정말 죽으려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다. 이렇게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까지 말이다. 그것도 그와 내가 서로 사랑하던 그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지구에서 말이다.
여든이 넘은 내가 아직까지 연구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벚꽃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뒤늦게 확인한 그의 마지막 메일.
"더 이상 벚꽃이 피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온실가스와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그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나라와 일본 같은 나라에서 더 이상 벚꽃이 피지 않는 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원자력발전소를 멈추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이었다. 그는 벚꽃 없는 봄을 막기 위한 싸움,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벚꽃을 지키고 자연을 지키고, 어쩌면 우리 젊은 날의 사랑을 지키려다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만약, 내가 그와 함께 했다면 그는, 아름다운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나는 벚꽃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우리 사랑의 기억들을 나의 방식대로 지키고자 모든 것을 던지고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예언처럼 우울한 일들이 벌어졌다. 온실가스 감축 협약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겨울은 점점 짧아졌고 봄은 점점 더 빨리 더워졌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유럽과 러시아, 중국의 원자력 발전소들에서 크고 작은 방사능 누출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 사이 벚꽃의 개화 날짜는 한 해가 다르게 당겨졌다. 21세기 초만 하더라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에 피어나던 한반도 남쪽의 벚꽃이 2020년대엔 3월 첫째 주에 피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1월 말에 피기 시작했다.
문제는 개화시기만이 아니었다. 해가 갈수록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나무가 늘어났다. 처음엔 작은 나무들이 꽃을 피우자마자 이내 힘없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잎사귀를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예 꽃 자체를 피워내지 못했다. 한 나무, 한 나무씩 꽃도 없이 잎사귀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유명한 벚꽃 축제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나라꽃을 지키려고 정부 안에 특별 부처까지 새로 구성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학교와 정부가 마련해 준 특별연구소에서 벚꽃 개화와 종 보존을 위한 연구에 매달렸지만 그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두 그루의 벚나무만이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 내 첫사랑이었어요. 그리고 이 나무들."
"설마, 이건?"
"네, 그래요. 여기 이 두 그루의 벚나무, 예순다섯 해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사람과 함께 심은 나무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렇죠? 나도 사실 그 점이 의문이긴 한데. 온난화도 문제지만 몇 차례에 걸친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다른 벚나무들에서는 바실러스 휴면포자가 거의 사라졌는데 이 나무에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이 나무의 포자는 다른 나무에서는 아무 효능을 나타내지 못하고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하죠. 이를테면 포자가 온난화나 방사능으로부터 이 나무만 지켜준다는 건데,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죠."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라."
나는 연구원을 돌아보았다. 어쩐 일인지 그렇지 않아도 흰 편인 그의 얼굴이 아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액세스 크리스털을 조작했다. 그러자 이내 눈 앞에 한 장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은 좀 전에 내가 가상 디스플레이 위에 펼쳐놓은 것과 똑같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어떻게?"
그 사진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래전, 그러니까 예순다섯 해 전, 그에게서 첫사랑 고백을 받은 그 봄의 야유회 자리에서 동아리 선배들과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선물이라며 두 그루의 벚나무를 심게 했고 기념으로 찍어준 사진이었다. 그가 죽은 후 사진을 찍은 선배가 나에게 필름과 함께 주었다. 나는 사진을 스캔하고 비밀 폴더 속에 저장해 두고는 벚꽃이 필 무렵, 그가 그리워질 때마다 꺼내 보곤 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사진을 보여준다거나 전송해 준 적이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 사진을 갖고 있죠? 아니, 당신, 누구예요?"
"저, 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 전 그냥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 사이버 해변에 있었을 뿐입니다."
"사이버 해변이라니? 그럼 불법으로 뇌파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단 말인가요?"
"그 정도 업데이트는 누구나 다 하는 걸요. 의회에서도 조만간 취미생활용 데이터 업데이트는 인정해 주는 법률을 통과시킬 거라고 합니다."
"좋아요. 그 문젠 일단 넘어가죠. 말해봐요. 이 사진, 어떻게 된 건지."
"말씀드렸듯이 전 갈대밭에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스트레스가 좀 심했거든요. 그래서 아주 약간의 사이버 알코올 기운도 빌린 상태였어요. 갈대밭에선 살랑살랑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습니다. 그러더니 바람에 실려 어떤 알 수 없는 향기가 나더군요. 좋은 향기였어요. 꽃 향기 같기도 했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연인의 향기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눈을 감고 그 향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방이더군요. 서버로부터는 접속이 끊어진 상태였구요. 그런데 그 후부터 저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이상한 기분?"
"뭐랄까?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그러면서도 제 아닌 또 다른 누군가 제 속에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 봐요. 그렇게 불법적으로 뇌파를 업데이트하니까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아니지, 그렇더라도 사진은 어떻게 된 거죠?"
"그래서 저도 경찰병원에서 뇌파 스캔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팸이나 해킹 흔적도 없고 아주 깨끗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얼마 후 바로 저 사진이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겁니다. 처음엔 희미하게, 마치 뿌연 안갯속 풍경처럼 떠오르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저렇게 또렷한 영상이 된 겁니다. 다시 병원에 가봤더니 역시 특별한 문제가 없는 데이터라고 하더군요. 의사는 오히려 아주 오래전부터 제 뇌에 경험적으로 저장된 자연스러운 데이터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한 것이 아닌지 물어보더군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사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그뿐이었다. 물론 사진을 찍어준 선배나 동아리의 다른 회원들이 사진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저렇게 똑같은 모습의 사진을 기억하고 있거나 연구원의 말처럼 완벽한 데이터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의 두 사진은 완벽하게 똑같은 것이다. 마치 복사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 사진을 보낸 적도, 보여준 적도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킹을 당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왜 하필 이 한 장의 사진만이 이 연구원의 뇌 속에 이미지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 눈은 분명 착하고 정직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그 깊고 맑은 눈망울에 얼핏 젊은 시절의 그가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가 아니다. 만일 그와 그가 닮았더라면 그동안 내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그의 눈에는 그가 보인다.
"저, 그런데 선생님?"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뭐죠?"
"저 사진과 함께 어떤 문장이 계속 떠올라서요."
"무슨?"
"그게 참, 무슨 고백 같은 거라서 조금 간지럽긴 한대요. 벚꽃 속에 네가 서 있었잖아."
순간 나는 정신이 멍했다. 어디선가 갈밭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21세기도 반이나 지난 이 과학 문명의 시대에,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 삶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봄 같은 이 겨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믿고 싶었다. 어떤 시인이 그랬던가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이라고. 정말 인연이란 게, 전생이란 게 있다면, 그래서 젊은 시절의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여든을 훨씬 넘어 백발과 주름살과 저승꽃이 가득한 모습으로도 그의 앞에서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힘겹게 그에게 말했다.
"당신, 정말 누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