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흔적이 남은 창가

by 리도씨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으면 오래전의 내가 눈을 뜨는 듯하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낡은 나무 틈새에 흔적을 남기듯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내 안에도 금을 그어왔다

어린 시절의 웃음도 청춘의 눈물도 다 이 창가에 스며 있는 것 같다


창문 유리에 비친 얼굴은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다

눈가에는 고요히 깊어진 주름이 앉아 있고

손등에는 계절을 건너온 빛바랜 시간의 무늬가 놓여 있다

그럼에도 그 흔적들이 어쩐지 서글프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진다

삶이 나를 스쳐간 자국이자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 같아서 그렇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조용히 스며드는 강물 같다

잡으려 하면 흘러가고 놓아두면 어느새 흘러넘쳐간다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거칠게 흐르지만 결국 모든 물결은 흔적을 남긴다

돌 위에 새겨진 물길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기억의 골을 파내고 간다

그 흔적이 아픈 상처일 수도 있고, 빛나는 추억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나라는 이름을 만든 결의 무늬가 된다


나는 창가에 앉아 오래된 의자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언제부터 나는 오늘을 오늘로 온전히 살지 못하고

내일을 염려하거나 어제를 후회하며 시간을 낭비했을까

그러나 이 창가에 앉아 있으면 알게 된다

세월은 내게 낭비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부셨던 순간도 쓰라린 순간도 다 나를 빚어낸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햇살이 서서히 기울어 가면 유리창 너머로 그림자가 길게 뻗는다

그 그림자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오면

나는 불현듯 어린 날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좁은 골목길에서 뛰놀던 내 발자국 소리도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리던 순수한 마음도 다 창가에 머물러 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는지

그 순간들이 얼마나 내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될지

그저 지나가버린 일상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모든 것이 나의 가장 빛나는 노래였다


세월은 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흔적이 남는다

스쳐간 인연이라도 그 짧은 순간이 내 안에 불씨를 심어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미소로, 어떤 이는 눈물로 흔적을 새기고 간다

그 흔적은 마음의 벽에 그림처럼 걸려 평생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삶은 결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말과 작은 행동마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에 잊히지 않는 흔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오래된 기억이 깨어난다

첫사랑의 떨림도, 부모님의 손길도, 친구와의 웃음소리도

모두가 비에 젖은 풍경처럼 선명해진다

그 기억들은 다 지나간 일이지만, 지나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살아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그것이 세월의 기묘한 선물이다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

흐르는 듯 보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 흔적이라는 이름으로 창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종종 그 흔적 앞에서 멈춰 서곤 한다

과거를 후회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어설펐던 나의 선택도, 서툴렀던 나의 사랑도, 무모했던 나의 용기도

결국 오늘의 나를 세운 벽돌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흔적이 남았다는 건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살아 있었다는 건 사랑했다는 증거다

사랑했다는 건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약속이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나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흔적은 단지 나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남긴 말 한마디, 건넨 손길 하나가 누군가의 세월 속에 남아

그들의 창가에도 빛처럼 머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조심스레 말하고, 따뜻하게 바라보고, 다정히 다가가려 한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기에

내가 남긴 자취가 누군가에게 아픔이 아니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 바람이 결국 나의 삶을 다시 빛나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월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강물이다

하지만 그 강물 위에 떠다니는 조각배를 어떻게 노 저을지는 나의 선택이다

흐름에 휩쓸려 후회와 원망으로 흔적을 남길 수도 있고

감사와 사랑으로 흔적을 새길 수도 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다시 다짐한다

흔적을 남기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 나를 떠올릴 때 따뜻한 미소가 번지길 바라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은 여전히 변해간다

그러나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월이 흔적을 남길수록 나는 더 단단해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흔적이 남는다는 건 나무의 나이테가 쌓이는 것과 같다

겉모습은 낡아가도 그 안에는 해마다 새롭게 태어난 계절이 겹겹이 쌓여 있다

내 삶도 그렇다

해마다 다른 빛깔의 계절이 내 안에 남아 나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창가에 앉아 세월을 바라본다

흐르고, 스며들고, 남겨지는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름답게 맞이하겠다고 다짐한다

흔적이 상처가 되지 않게, 흔적이 원망이 되지 않게,

흔적이 누군가에게 노래가 되고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을 살아간다

세월은 결국 우리 모두의 창가에 머물다 간다

그 창가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흔적을 남길지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나는 이제야 안다

세월이 흔적을 남긴다는 건, 결국 삶이 나를 빚어내는 방식이라는 걸 안다

그 흔적들이 모여 나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다시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는 노래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시간이 다 흘러가더라도

이 창가에 남은 빛과 바람과 기억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물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사라지지 않고, 흔적은 끝나지 않고, 삶은 이어지게 된다


오늘도 나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지 않고 다만 감사로 끌어안는다

다가올 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세월이 남긴 흔적은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이 창가에 남은 모든 빛과 그림자들이 결국 내 삶의 가장 고운 노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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