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산수유 마을에서, 짧은 봄을 걷다

by 리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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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면 발걸음은 으레 이천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산수유 굽이치는 골목이 불현듯 내어주는 찰나의 아름다움, 그것은 내게 일상을 버티게 하는 다정한 위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족과 함께 나섰다. 그예 달아나버릴 듯 짧은 이 계절의 밑동을 가만히 쥐어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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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백사면은 소란스럽게 봄을 외치지 않는다. 옹기들이 무던히 앉아 있는 담벼락, 뭉툭하게 쓰인 '봄의 전령사'라는 인사말이 먼 길을 달려온 이의 어깨를 토닥인다. 작은 창을 낸 들꽃 압화원 처마 위로 볕이 나른하게 부서진다. 이천의 땅은 늘 그렇게 무던하고 뭉근한 얼굴로 사람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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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쪽으로 굽어들면 소박한 잔치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선명한 붉은 천막 아래, 넉넉한 솥단지와 상인들의 잰손놀림이 풍경에 활기를 얹는다. 단상 위에 가지런히 도열한 막걸리와 즙액들. 병마다 이천의 햇살과 산수유의 시큼달큰한 붉은빛이 찰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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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을 지키는 샛노란 커피 트럭은 마치 스스로 한 그루의 산수유꽃이 된 듯 앙증맞다. 삶의 고단함 대신 온기만이 가득한 사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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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돌려 비탈을 오르면 비로소 아득한 노란빛의 융단이 펼쳐진다. 잎도 채 나지 않은 마른 가지 끝마다 좁쌀만 한 태양들이 수만 개씩 맺혔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여린 꽃술들이 엉켜 봄바람에 미세하게 몸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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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어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머문다. 노란 꽃그늘 아래서 서로를 렌즈에 담는 연인들, 마른 언덕배기에 쪼그려 앉아 땅이 밀어 올린 초록을 살피는 뒷모습, 돌담 옆 좁은 터에 자리를 펴고 가만히 볕을 쬐는 이들의 둥근 어깨.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짧은 봄의 한가운데를 유영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 신발 밑창에 묻어온 이천의 흙먼지마저 가볍다. 찰나의 봄은 결국 지고 말겠지만, 가슴에 담아온 짙은 노란빛은 우리 가족의 남은 한 해를 덥혀줄 작고도 선명한 불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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