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가 전해준 선물

by 리도씨

세상은 매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 휴대폰 알림, 자동차 경적, 뉴스 속 속보, 전광판 위 흐르는 자막들까지.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속삭이며, 모두가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끝없이 흘러가는 말의 강물 속에서 나는 문득,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떠올렸다. 바로, 고요였다.


고요는 침묵이 아니다.

고요는 마음의 표면이 잔잔해지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선명한 소리를 듣게 되는 시간이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자신의 호흡이 천천히 이어지는 소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말 없이 울리는 진심의 목소리. 나는 그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과 대화하게 되었다.


어릴 적, 나는 종종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별이 총총하던 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 계획 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무언가를 느끼는 데 익숙한 아이였다. 달이 환하게 뜬 날이면, 왠지 슬픈 사람의 마음이 어딘가에서 흘러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엔, 누군가의 울음을 대신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고, 해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고, 길가에 피어난 꽃을 멈춰 볼 여유도 없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무너지는 듯한 저녁을 만났다.

이유 없이 공허해지고, 이유 없이 세상이 낯설어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차를 몰고 한적한 바닷가로 향했다. 겨울 바다는 차가웠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바다 앞에서 나는 고요를 만났다.


고요는 처음엔 낯설었다.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고,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불안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 오래 머무르자, 나는 조금씩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갈 때,

마치 “괜찮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파도가 모래 위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고, 잊고 있던 감정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고요는 바로 그 비움의 시간이었다.


고요 앞에서는 모든 꾸밈이 벗겨진다.

더 이상 누구의 아들도, 누구의 친구도, 사회적 역할도 아닌, 오직 나로 남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정말 괜찮은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고요는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문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 삶을 진짜로 바꾼다. 수많은 말보다, 수많은 조언보다, 조용히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이야말로,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진짜 시작이다.


그 바닷가에서 돌아온 후, 나는 가끔 일부러 고요를 찾아 나선다.

새벽의 공원, 눈 오는 날의 들판, 사람이 거의 없는 도서관의 한 모퉁이. 그런 곳에서 나는 삶을 다시 정돈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흩어진 감정을 모으고, 가슴 깊이 묻어둔 말을 꺼내어 스스로를 어루만진다.

고요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너는 충분해.”


그 한 문장이 나를 구했다.

나는 더 이상 완벽하려 애쓰지 않았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냥 하루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슬픈 날이면 울었고, 기쁜 날이면 웃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고요히 앉아 있는 날도 만들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삶이 더 깊어졌다.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나, 그리고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진짜 나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제 안다.

고요는 도피가 아니라 귀환이라는 것을.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지금 너무 많은 소리와 말들 속에서 길을 잃었을지 모른다. 혹은 스스로의 진짜 목소리를 잊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오늘, 아주 잠깐이라도 고요 속에 머물러 보자.


말하지 말고, 듣지도 말고, 단지 조용히 숨만 쉬며 가만히 있어보자. 그렇게 내면의 표면이 잔잔해질 때, 아마도 당신 안에서 어떤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일 것이다.


그 불빛이 당신의 길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고요가 당신에게 전해줄 것이다.


가장 따뜻한 선물 하나를.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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