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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l 11. 2021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쓰지 못하는 이유

솔직함에 대해


나는 내 글에 대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신혼부부의 글을 읽고 내 글은 ‘선택적 솔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글을 쓰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내 글은 ‘선택적 솔직’이었다. 글의 내용 자체는 솔직한 생각들이었다. 반성이 들어 있었고 후회가 들어 있었고 다짐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글과 실제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글 속에서의 내 삶은 온전한 내 모습이 아니었다. 글 속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언젠가 남편이 읽을 날이 올 수 있다, 사람들에게(언젠가 내 글을 읽을 지도 모르는 가족과 친구들, 지인들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글에 악세서리를 달 듯 선택적으로 좋은 모습만을 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나니, 나 자신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글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혼자이고 싶을 때도 있고 결혼을 후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후회의 감정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행복한 순간이 많고 결혼하길 잘했다'와 같은 무게로 수시로 밀려 오는 '후회, 번뇌'의 감정. 나에게 있어 이 두 감정은 동일한 무게다. 하지만 나의 이 두 감정을 들은 친구들은 행복의 이야기보다는 후회와 번뇌의 이야기만 기억하려 한다. 가족들도 걱정의 눈빛으로만 바라본다. 결국 마이너스 감정들은 내 안에서 꾹꾹 쌓여만 간다. 잘 지내고 있지만 때때로 힘든 순간도 온다는 것인데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선택적 솔직’이 몸에 배어 버렸고 글 속에서조차 나는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가식적인 모습에 혐오감마저 느낀다. 내 글과 나의 삶의 괴리에 힘이 빠진다. 글을 쓰는 이유가 혼란스러워진다.     

 

대화가 통하는 누군가


<어린왕자> 책 중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린왕자를 만나 비로소 저자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표현하는 장면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의 바람이다. 간혹 통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있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이 날실과 씨실처럼 격자로 엮이며 이어지는 삶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역시 없었고 없다.


나에게 추억이란 일상생활 중 가위로 오려내어 손에 들고 바라보게 되는 특별한 시간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추억은 곧 사라질 것이란다. 그녀에게 내 추억의 의미를 설명하다 그만 지치고 만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추억들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으로 찍듯 한글자 한글자 새겨넣는 것이다. 이렇게 추억을 추억으로 대우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는 나에게 던지는 그녀의 ‘그 추억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난폭하게조차 들린다.  

   

사실 이제는 대화가 통하는 누군가에 대한 기대는 없다. 남편과도 대부분은 대화가 통하지만 그 통하지 않는 일부분으로 인해 부부싸움에 가까운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느끼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간격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세상에 온전히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지금의 나의 결론이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나 자신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배 아파 낳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안다고 믿는 그 순간 오히려 오해가 발생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나의 추억과 너의 추억의 정의가 다른 것 같아,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결국 이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마무리랄까 나의 이 말에 그녀는 대답이 없다. 정의를 설명하는 것에 에너지가 소비되는 대화는 피로하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고 이십 여년 가까이 생각해 왔던 친구에게 이제는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나이만큼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 경험의 폭, 깊이만큼 서로 다른 생각의 깊이와 폭, 그리고 색깔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상대의 모든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부분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일기를,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누군가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거스름 없이 대화하고 싶어서다. 글에서 만큼은 솔직해 지고 싶다. 민낯의 글을 쓰고 싶다. 글 속에서조차 민낯으로 있을 수 없다면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냐고 나에게 묻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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