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Nov 10. 2021

김혜리의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 책은 영화일기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 때문이다.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봤어요.” 이것이 신형철 평론가가 그녀에게 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를 말하자면 그가 바라본 시선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 난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쓴 ‘문장을 보았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게다.     


정의는 언제나 복수보다 까다롭고 복잡하다가해하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끼리의 정산을 넘어 사회 구성원 전원을 호출해 연루시키고 판단을 요구해야 하는 문제여서다법을 위시한 시스템’ 역시 다수의 동의로 지어지고 굴러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나눠준다복수는 구경할 수 있지만 정의는 관찰자도 심문대로 데려간다.(p133)”      


정의와 복수의 차이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든 문장이다. 복수는 쉽지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려운 말들로 가득 채워진 두꺼운 책 속에서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이 생각을 만난다.      


법 위에 사람이 있는가, 사람 위에 법이 있는가. 결국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법이건만 법이 사람들을 움직일 때가 있다.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법의 망을 잘 피했다는 것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법이 있기에 안전하지만 그 법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 또한 있다.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의 복수가 아니다. 모두에게 나누어진 책임을 감당할 때 인간다운 사회가 이루어진다.      


그는 소유물에게 인생의 한 수를 배웠으니 패자도 아니다.(p147)”   

  

각각의 영화가 있고 그 영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었는데 나는 거칠게 이렇게 문장을 잘라낸다. 영화가 의미가 없어서는 아니다. 영화 자체보다 그녀의 문장에 더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패자에 대한 그녀의 정의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만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는가’를 기준으로 정의한 그녀의 이 말에 단호함이 느껴진다. 이 문장이 분명 누군가를 구하리란 생각이 든다.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프란시스는 설명하기 힘들다고 답한다. (...) “그 일을 진짜로 하고’ 있는 건 아니어서라고 부연한다하고 있으나 정말로 하진 않는다는 느낌살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지 않다는 감각.

경제적인 궁핍은 둘째고프란시스는 성공이건 실패건 아직 제 삶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내다보고 계획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p196~197)”     


이 문장을 읽고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의 직장은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나름 좋은 회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모임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한 사람의 몫을 다 하고 있지 못해서요.”라고. 질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대답은 어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아직 1인분의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날 집에 오면서도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 섞인 의문을 느꼈다.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잘 모르는 사람이고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거의 없는 그 사람에게 나는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어쩌면 생각할 여유도 없이 툭 던져진 질문이었기에 무방비로 본심이 나와 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 오랜 의문의 답을 이 책에서 만난다.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월급이나 회사의 이름만으로는 (적어도) 나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나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이 일을 하고 살겠구나, 이 일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나는 이 일을 결코 떠날 수 없겠구나, 이 일이 나를 배신할지라도’라는 정도의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이 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나도 모르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는 그 당시 그런 확신이 부족했다. 불안했다. 반복되는 계약직과 프리랜서 생활.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공간에서의 일은 행복하면서도 불안했다. 늘 이방인의 마음이었다. 삶에서도 일에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마음이 한 사람의 질문으로 무심코 터져버렸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나탈리는 다행스럽게도 자아를 찾아’ 훌쩍 떠나지 않는다그 나이까지 차곡차곡 살아온 시간이 자아가 아니라면 무엇이 자아란 말인가위기는 그동안의 삶이 청산돼야 한다는 선고가 아니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나탈리의 지난 인생을 부정하는 대신 다가오는 것들에 대응하는 방법을 그녀가 평생 공부하고 가르쳐온 철학에서 찾는다.(p263)”


내가 여행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이 문장을 통해 알았다. 보통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자아를 찾아 떠난다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든가. 하지만 김혜리 작가는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자아를 찾아 떠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삶은 청산돼야 하는 선고가 아니라고. 속이 시원하다.     

 

25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은 외도를 고백한 것도 모자라 집을 나가고, 하루에도 여러 번 자살 소동을 벌이며 괴롭히던, 그럼에도 사랑했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지금까지의 삶이 허무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만 같은 주인공. 그녀에게 김혜리 작가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현재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물론 그게 정말로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인가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지만) 과거(과정)까지 부정하는 것은 가혹하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해서 지난 시간들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옳다 그르다는 표현은 되도록 아끼고 싶지만 여기서는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생각이 영화 속 주인공을 구하는 느낌이다. 이런 위로가 필요한 또 다른 어떤 이를 구할 것만 같다.    

 

저자의 문장이 모두 따뜻하기만 하지는 않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차가움도 느껴지고 냉정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대부분 수긍이 간다. 서로의 삶이 연결돼 있으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우리는 연결돼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p34)”고 말한다. 이 조심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어른의 문장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인간은 도대체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어째서 내가 아는 진실을 모르는 듯 보이는 타인을 만나면 아는 바를 전수하지 못해 안달하는 걸까냉정한 답은 잘난 척하고 싶어서착한 대답은? ‘그저 마음이 쓰여서.(p280)”라고. 알고 있던 말이지만 그녀의 문장을 통해 만나니 속이 시원한 느낌이다.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여서 그렇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이대며 잘난 척하고 싶었던 적이 있고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그런 마음을 만났던 적이 있다. 그녀의 문장을 통해 나를 보고 타인을 본다.    

 

나는 문득 이해한다세상 어느 곳에서도 휴식할 수 없는 영혼들이 스크린에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는 이유를.(p341)”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이다. 여기서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서두에서 말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녀의 문장을 읽기 위해 영화를 보게 된다는 그 말을.      


문장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문장에는 한 사람의 삶이 들어 있다. 얼굴이나, 나이, 이름, 사는 곳, 직업과 같은 신상정보보다 어쩌면 더 적나라한 민낯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는 그녀의 삶을 만났고 그녀를 만났다. 그래서 서평을 쓸 때면 언제나 따뜻한 커피가 필요하다. 책과의 만남에 흔적을 남기는 이 시간을 더 즐기기 위해. 

작가의 이전글 불안의 색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