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웅진지식하우스, 2020)
살고 싶다는 농담. 이 문장을 보면 왠지 눈물이 난다. 살고 싶다는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건강한 자의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읜 남편을 보며 그에게 또다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단 생각은 한다. 사진으로밖에 뵌 적 없는 시부모님이 가끔 꿈속에 나오셔서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시듯 자상한 미소를 보이신다. 왜 그분들은 내 꿈에 찾아오시는 걸까. 사람을 잘 챙기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대하지 못해 나중에서야 후회하고 마는 나. 그분들이 나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려는 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뜨겁게 살지 않는다. 언제부터일까. 내 안에서 열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깨진 독의 물 붓기처럼 끝없이 부족하기만 한 노력 앞에서 지쳐버린 것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먼 꿈을 위해 하루를 숨 막히게 보내지 않는다. 잘살고 있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안심하게 만드는 회사의 그늘을 벗어나 구직자의 이름표를 달 때마다 나는 매번 이력서 앞에서 침전한다. 판매대 위에 놓인 세일 상품처럼 구차하게 나를 돌아봐달라고 구걸한다. 연도와 연도 사이의 비어 있는 경력을 보며 당시의 나는 무얼 했는지 생각에 잠긴다. 돈을 벌지 못했던 때는 마치 숨 쉬지 않았던 시간인 것만 같고, 죄책감마저 든다. 어쩌면 이력서를 보내고 기다리던 날들에 비례하여 꿈이 하나씩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안의 열정은 차츰 식어갔는지도 모른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고 믿지만 유독 그 말이 나에게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꿈을 꾸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의 나는 아마 결론보다는 매일 매일의 결심 자체에 설레했을 것이다.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면서 꿈을 이룬 그날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현실의 벽을 알아버린, 어쭙잖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비겁한 자조와 비관 뒤에 숨어서.
허지웅 작가의 글이 좋다. 그의 글은 날카롭지만 부드럽다. 차갑지만 포근하다. 단호하지만 내치지 않는다. 무겁지 않지만 힘이 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말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라고. 마음이 가난한 어른의 얼굴을 벗어버리고 핑계는 그만 대고 얼른 다시 꿈을 꾸어 보라고 말한다.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꿈조차 숨기는 비겁한 어른이 되지 말라고, 그는 나에게 말한다.
쓰고 싶다는 농담. 사실 나는 모든 것이 두렵다. 허무함과 공허함이라는 단어는 외롭다는 단어를 숨기기 위함에 불과하다. 사람을 소중히 여겨오지 못했던, 변명만 가득했던 지난 선택의 결과가 너무나 무거워 구차하게 꺼낸 가면이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두려워서 미리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나를 채운다. 그리고 이 허무함과 공허함을 숨기기 위해 글을 쓴다. 두렵고 외롭고 슬픈 감정이 두려움으로 변하지 못하도록 글을 쓴다. 하지만 나의 쓺 또한 결국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쓰지만 쓰지 못할까 봐 두렵고 쓰지만 읽히지 않을까 봐 두렵다. 두렵지만 두렵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꿈이 아니라고 배신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인지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잘못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비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살고 싶다는 감정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이별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쓰고 싶다. 하지만 두렵다. 두렵지만 쓰지 않는 삶은 나에게 있어 살아 있지 않음과 같다. 쓺이 안겨줄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심할 수밖에 없다. 쓰고 싶다는 농담, 이것이 허지웅 작가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