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권의 인생의 책을 만났다. 인생의 책에 대한 서평은 쓰기 어렵다. 한두 번 읽고 서평을 ‘감히’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 아닐까 싶다. 나를 멈추게 한 문장들을 나열하고 그 문장들을 보며 느낀 생각들을 나열하는 것. 지금은 나무를 볼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내 자아가 더 성숙했을 때, 숲을 보며 한 편의 정리된 서평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 고통에 대하여
“자기 고통을 건드려야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어두움을 건드려야 어두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고통을 감내해야 그 가치를 알고, 어둠이 곧 힘이자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p24)”
나는 가끔, 그리고 자주 아프다. 행복한 순간만큼 아픈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 고통은 오래되었다.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부터니까. 이 고통을 벗어나고자 종교에 빠졌던 적도 있고 글로 도망가려고도 했던 적도 있지만 피할 수 없음을 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아니 살아 있는 동안 함께할 수밖에 없단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이 문장이 말한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고. 이 문장은 위안이 된다. 나는 살아있다.
# 나쁨에 대하여
“개인의 성숙함을 판단하는 지표는 자신의 ‘나쁨’을 어느 정도 직면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기 내면의 원시적 부정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언제나 옳고 바른 사람이라는 강한 내적 요구의 작용으로 자신에게 나쁜 면, 연약한 면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p43)”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면 주위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쁨’을 남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 자신이 불안한 이유는 상대의 말투가 거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잘못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려 자신은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p44)”
내가 그린 이상적인 나의 모습 안에는, 옳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끄러워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웃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러나 나의 본성 안에는 그런 바르고 옳고 좋은 사람만이 아닌 비뚤어지고 고약하고 버릇없는 내가 있다. 그런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내가 옳고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나 이외의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이 말이 내 머리를 세게 내리친다. 충격적일 만큼 강한 메시지다. 맞다. 내가 옳고 바르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했음을 왜 몰랐을까. 이 말로 인해 나의 어두움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마음 편히.
# 나를 위해 살다
남극 반도로 가는 배의 갑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번의 인생이 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 번째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p74)”
나는 살고 싶다는 감정을 모른다. 그래서인지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친구에게 오랫동안 질투를 했다. 그녀의 그런 삶에 대한 열정이 집착이나 집념처럼 느껴질 만큼 부러워 질투했다. 지킬 것이 생긴다면 살고 싶단 생각을 할까, 란 생각도 했다. 그것 또한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 저자는 말한다. 두 번째 인생은 나 자신을 위해 살라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란 존재를 깨달으라고.
사실 난 아직도 이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란 건 알고 누군가에게도 수없이 그렇게 말해왔지만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 말은 이기적이 되라는 것도 아닐 테고,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말도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걸까. 아직 잘 모르겠다. 모르지만 이 문장 앞에서 떠날 수 없어 자꾸 서성이게 된다. 알고 싶은 것 같다. 나를 위해 산다는 말의 의미를. 그래야만 내 안의 해묵은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는 것 같다. 아마 나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래서 나를 상처 주는 것이 내 생각임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가 정말로 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내 생각이 나를 상처받게 할 수도,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연결되었을 때, 내 생각은 가치 있는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p62~63)
# 나의 적은 누구인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적의 존재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 적이 권력이나 사회 시스템처럼 먼 곳에 있는 존재 같다. 하지만 자신을 알면 알수록 적도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가족일 수도 있고,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 적이 자기 마음에 있다고 깨닫는다. 적은 나의 ‘본능’ 중 일부이며, 줄곧 외면했던 ‘감정’이며 ‘경험’이다. 이를 진심으로 끌어안아야 세상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p86~88)”
나의 적은 누구인가. 나 자신이 나의 적이었음을 이 문장을 통해 알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사실 내 안에 있던 것들이다. 내가 회피해 왔던 것들 또한 근원은 내 안에 있다. 머리로는 안다고 믿었지만 몸이 거부하고 있던 진실이다. 가끔씩 내 꿈속에 나와 나의 감정을 대변하는 내 안의 감정들. 꿈으로 나에게 말하곤 한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래서일까, 이 문장을 자꾸 만지게 된다.
# 자아를 부수고 재설정하다
“자아가 파괴된 사람은 자아가 안정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반대로 자아가 안정된 사람은 자아가 파괴된 사람의 공격을 통해 굳어버린 자신의 자아를 부수고 재설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p120)”
이 문장 앞에서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간신히 자아를 찾아 설정했건만 그걸 파괴하고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안정된 자아를 가진 사람끼리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해진다. 힘겹게 찾아낸 자아를 왜 파괴해야만 하는가. 이 문장을 이해하고 싶어서 서평 쓰기를 멈추고 이 문장과 거리를 두고 가끔씩 꺼내어 보곤 했다.
오랫동안 나를 지켜줄 신념을 찾아 헤매었고 드디어 나 나름의 신념을 찾아 그 신념의 갑옷으로 나를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신념이 지나치게 견고해서 썩은 물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다. 어쩌면 자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 맥락의 의미인 것일까.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한다.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거울이 필요하다. (...) 거울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기분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비추기도 한다. (....) 더 중요한 것은 거울이 정의한 자신을 인식한 뒤 그것을 깨뜨려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p139)”
내 생각과 신념과 가치관이 나 자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나의 틀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오랫동안 알고 싶어했고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몰랐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올곧고 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한 자아는 우리의 ‘이상’이다. 실제로 들여다보면 욕심과 탐욕, 열정과 욕구로 점철되어 있다.(p167)”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박관념은 내려놓았다. 내 안의 ‘좋은’을 버림으로써 내 안의 어둠도 인정했고 그래서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에 대한 이상을 그리며 ‘완벽한’ 아내, 엄마가 되고 싶어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나는 좋은/완벽한 엄마나 아내는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에게나 나의 아이에게 ‘좋은, 완벽한’을 요구할 수 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