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닮은 너
임신 중 입버릇처럼 남편과 쏙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그 말과 정반대로 날 꼭 닮았다. 외모도 닮았지만 성격마저 닮았다. 잠투정도 심하고 낯가림도 심하다. 어릴 적 나는 잠드는 게 고통이었다. 모든 가족이 잠든 어두운 방안에서 몇 시간이고 잠들지 못해 괴로웠던 기억이 강하다. 마치 산 채로 관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낯가림도 심했다. 우리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난 낯가림이 있다. 잘 웃고 밝고 누구와도 말을 잘 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내 가까이에 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후에는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아이가 이런 나를 닮아버렸다.
아이를 보며 엄마를 떠올린다. 어린 여자아이 셋을 두고 어떻게 집을 나갈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엄마를, 기억조차 거의 없는 엄마를 떠올리며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가전제품을 갖춘 가정이 거의 없던 시절, 냉장고, 전화기는 물론 자동차까지 몰면서 사장님 부인 소리를 듣다가 나를 임신하던즈음 아빠의 사업은 기울었다고 한다. 날 임신했던 시기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난 2kg가 조금 넘은 아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내 아이가 2.6kg이라 무척 작았는데 그보다 작았다니 얼마나 작았던 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모님 소리를 듣고 살다가 단칸방에서 아이 셋을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은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빠도 기울어버린 사업 탓이겠지만 집을 자주 비웠고 부부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셋째마저 딸이라는 사실에 시댁에서도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엄마도 나를 낳고 발로 밀어버릴 정도라고 들었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냈던 엄마. 아이들을 두고 나가고 싶었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나마 순하지 않았을 나. 울고 보채고 낮잠도 잘 안 자고 낯가림도 심해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을 나. 도망치고 싶었을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 감정노동자
육아만큼 감정노동일이 있을까란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아이 앞에서 울 수는 없다. 눈물은 흐르지만 웃으며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속아주지 않는다.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거짓 웃음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가 보다.
<겟아웃>이라는 영화가 있다. 상류층 백인들에게 육체를 빼앗긴 흑인들의 이야기다.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한 하인 흑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육신은 백인 할머니에게 빼앗겼지만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서 눈물이 흐른 것이다. 엄마들은 아이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다. 아이마저 슬프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 아이가 있으니 좋네
아이가 생기니 좋다고, 삶이 다양해졌다고, 그렇지? 라고 동의를 구하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라고. 아이가 있어서 좋은 게 아니라 내 아이 000(이름)가 있어서 좋은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이가 없어도 되고 결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다만 내 아이 000(이름)가 있는 게 좋은 것 뿐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은 내 아이를 낳은 일이다. 처음으로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가 생겨서 좋은 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소중하지만 난 아이들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나의 기억 속 엄마는 거의 없다. 간간히 기억나는 것도 기억이라기보다는 언니들에게 들은 '정보'다. 아이를 키우며 너무 힘들 때는 어릴 때의 나도 그랬냐고 묻고 싶지만 물을 곳이 없다. 아빠에게 물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자는 밖에서 '더 열심히' 돈을 벌어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하기에 그럴 것이다.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커다란 마디는 기억하지만 마디와 마디 사이의 촘촘한 변화와 성향 등은 아빠는 모른다. 365일, 24시간 함께 있는 엄마밖에 모르는 모습들이 있다. 커다란 마디마디는 웃음과 기쁨과 놀라움을 주지만 마디와 마디 사이의 촘촘한 변화들과 성장의 조각들은 대부분 엄마를 울고 화나고 힘들게 한다. 그 조각들을 거쳐야 커다란 마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일 게다.
# 엄마는 희생이다
제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끝까지 거부하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맞다. 잠투정도 심한데 요즘은 아이가 그나마 그 낮잠도 잘 자지 않는다. 아이가 자야 이유식도 만들고 집안일도 하고 밥도 먹고 씻고 생리적인 현상도 해결하고 책도 읽고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는데 말이다. 낮잠이라는 한정된 시간안에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몇 가지는 포기해야 한다. 대부분 포기되는 것은 먹고, 자고, 씻는 행위다. 그래야 더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끝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이 말, 엄마는 희생이라는 이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는 없고 '엄마로서의 나'만 존재하는 삶. 나는 누구일까란 생각이 찾아오면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한다. 생각은 나를 괴롭히니까.
#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날 닮은 너. 언젠가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이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의 생각들마저 닮았을까 봐 마음이 아리다. 내 아이만큼은 엄마가 되지 않길 바라지만 날 닮았다면 엄마가 되고 말 것이다. 자기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말 테니까. 아이를 낳고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아이는 궁금해하고 말 테니까.
만약 내 아이가 엄마가 된다면, 그 아이(손주)만큼은 내가 대신 키워주고 싶다. 내 아이만큼은 엄마가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하지만 만약 내 아이가 정말로 날 닮았다면, 힘들어도 자기 자식은 스스로 키우겠다고 말할 게다. 힘들어도 자신의 선택의 책임은 스스로 지겠다고 말할 게다. 날 닮은 이 아이를 보며 나의 단점마저 닮아버린 것 같아 이 아이. 날 닮아 안타깝고 그래서 힘들기도 하지만 역시나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