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고 가볍게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과 육아는 정리하고 끝내면 완료되는 과제가 아니라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두고 힘들 때마다 가끔씩 꺼내 보던 이 책.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다.
# 결혼한 여자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그림
“내가 엄마가 되기 전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행복해 보였다.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엄마의 삶을 사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행복 이외의 다른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 그러나 눈앞의 현실에 대한 내 반응은 빌과 앨린의 숨겨진 본능처럼 야만적이고 저속했다.(p121)”
다들 안다. 결혼은 현실이란 걸. 사랑만으론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주변에 한두 명쯤은 분명 있을 것이다. 결혼의 힘듦을 호소하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나는 다를 것이다, 우린 다를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사람의 단점도 알지만 장점을 훨씬 더 많이 알고 그 단점들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은 A와 B가 만나 A+B가 되는 것이 아니라 A안의 A-1, A-2, A-3 ... 들이 B-1, B-2, B-3들과 만나 전혀 다른 C+D가 되는 과정이었다. 민낯의 나와 민낯의 타인이 만나 자기 자신조차 모르던 새로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결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선택(모험이자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민낯을 알아서는 안 된다. 기대와 환상 없이는 할 수 없는 선택이 결혼이다.
이 책에 나온 수많은 그림들과 그 그림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보며 결혼한 여자들에게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결혼뿐 아니라 환상과 기대 없이 새롭게 무언가를 도전할 수는 없다. 또한 결혼이 부정적인 것만 있고 불행만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육아가 아무리 힘들다고 아이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처한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지만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그동안의 나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 기회는 삶이 주는 값진 선물이다. 받고 싶다고 받고 받기 싫다고 거절할 수 없는 필연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의 빛깔은 더 깊어지고 다양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건 분명하다.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험난한 모험을 겁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환상과 기대가 필요하기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을 ‘결혼한 여자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란 생각을 했다.
# 결혼한 여자밖에 볼 수 없는 그림
“엄마가 되기 전 내가 ‘환희’라는 말을 알고 있었을끼? 엄마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고 수줍은 얼굴을 하는 아이를 알기 전에, 가을 저녁 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에게 행복을 고백하는 아이를 알기 전에, 내게 ‘행복’이나 ‘기쁨’ 같은 말들이 진정 의미가 있던 것이었을까? 오늘도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의 몸 안에 함께 살고 있다가 세상으로 나온 두 발을 어루만져본다.(p99)”
행복한 눈물이란 것이 어떤 것이지 처음으로 알려준 내 아이. 세상에서 평생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준 존재. 그게 자식이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부모, 형제와는 다른, 나 스스로 선택한 가족인 남편과 아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잘라낼 수 없는 피부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한 존재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경험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그림이 이 책 속의 그림이 아닐까란 생각에 ‘결혼한 여자밖에 볼 수 없는 그림’이라고 책의 제목을 바꾸어 보았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일 때 언니들이 결혼을 했고 함께 살았기에 나 나름대로는 언니의 임신과 출산, 육아에 익숙하다 생각했다. 조카들 이유식도 만들어 주었고 조카들의 어린이집이며 피아노 학원까지 함께 상담가고 학교 행사도 모두 참석할 정도였다. 언니의 임신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기에 이 또한 나는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모든 경험은 듣거나 읽는 것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스스로 겪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뻔한 진리를 결혼과 육아를 통해 배우고 있다.
# 결혼은 그동안 회피해 온 것들의 집합체이다.
결혼은 무엇일까. 이 책의 서평을 계기로 계속 나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답을 내지 못하는 한 서평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있어 결혼이란 그동안 회피해 온 것들의 집합체라고. 마치 ‘나는 문과니까 앞으로 수학이나 과학은 살아가면서 필요할 이 절대로 없을 거야. 그러니 무시해도 돼’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숫자 무더기와 표준 주기율표를 암기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나와버린 느낌이다.
기다림과 인내, 타인과의 거리조절,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들은 모두 내가 인생에서 회피해 온 것들이다.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그게 늘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결혼도 그렇지만 육아는 끊임없는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이다. 육아는 매일 매일 나에게 알려준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과 육아를 통해 나는 나의 밀린 과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 내 삶의 주어는 나다
삶은 문장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엄마가 된다는 건 그 주어 자리를 아이에게 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란 자아는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고통스러웠다. 내가 없는 삶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며 정말로 이 예쁜 아이가 내 삶을 빼앗는 존재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 끝에 이런 답을 내렸다. 나는 아이에게 내 주어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며 나는 남편에게 내 주어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고. 결혼과 육아란, 나의 주어를 수식하는 수식어가 늘어나는 것뿐이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는 그대로지만, 그 ‘나’를 수식하는 ‘어떠어떠한’이 늘어나는 것뿐이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의 엄마인 나가 되는 것이고 가끔씩 내 마음을 몰라줘서 속상해하고 화를 낼 때도 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편의 아내인 내가 되는 것이다.
“삶이란 스스로 웃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겨우 깨달은 제가 독백으로 시작해 마침내 고개를 들고 대화를 청하기 시작한 이 책이 누군가 스스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소임을 다한 것일 테지요.(p9)”
삶의 주인공은 나다. 결혼이든 일이든 그게 무엇이든 누구도 날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스스로 웃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아이가 손타면 엄마가 힘들다고 안아주지 말라는 사고방식도 있지만, 아이 평생에 그렇게 엄마에게 매달리며 안아달라고 보채는 시기는 십 년도 아니고 오 년도 아니다. 언젠가 아이는 커서 부모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다시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길지,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고통의 시간으로 여길지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가 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내 삶을 나 스스로 정하고 내 삶이라는 문장의 주어를 더 화려한 수식어로 만들 수 있는 것도 결국 나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든 삶이란 스스로 웃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