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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n 10. 2024

엄마로 자라다


# 물건과 살다


내가 물건과 사는 건지 물건이 나랑 사는 건지 문득 헷갈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구매를 하다 보면 한 개를 사는 것보다는 두 개, 세 개를 사는 게 더 이득이다. 3인가족이지만 아직 1인은 자기만의 물품이 따로 있는지라 성인 둘이 쓸 물건을 대량으로 사는 건 솔직히 늘 고민스럽다. 그렇다고 낱개로 구매하면 몇 달 후에 다시 또 사야하니 이 또한 낭비가 아닐까란 생각에 결국 대량으로 구매하고 만다. 


이제는 아기라는 한 명의 식구가 생겨 아기의 물건도 따로 구매하고 있다. 이유식을 먹다보니 아기가 먹을 십 몇 그램을 위해 500g 혹은 1kg을 구매할 때도 있다. 이렇게 구매하다보니 물건들이 집안에 쌓이고 있다. 가끔 집안을 쓱 둘러보다보면 이런 물건들이 과연 옳은 소비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단 돈 몇 천원, 몇 만원을 아끼기 위해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고. 하지만 결국 구매하는 순간에는 그 단 돈 얼마를 아끼기 위해 대량으로 구매하고 만다. 그리고 그 대량의 물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소비될 때마다 안심한다. 나의 선택을 틀리지 않았다고. 마지막 하나까지 소비될 때까지 계속 이런 생각을 하고 만다. 


# 남편은 부사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장은 주어와 동사만 있어도 성립된다. 목적어가 필요 없는 동사도 있고 목적어가 없어도 문맥은 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문장에서 꼭 필요한 성분은 아니다. 하지만 부사가 있음으로 해서 문장은 더 맛깔스러워진다. 반대로 부사가 없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문장이 밋밋하고 개성이 없어진다. 


나의 문장의 주어는 '나'였다. 모든 삶의 중심은 나였다. 그러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문장의 주어 자리에 '아기'가 들어왔다. 어제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임신 전에는 일년에 한 번도 병원 갈 일이 없었는데 임신한 후로는 1주일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씩은 검진을 다녔고 아이를 낳은 후로도 아이의 예방접종으로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병원을 다닌다. 그렇게 병원은 나에게 있어 아이와 함께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어제는 처음으로 혼자 병원을 갔다. 그 병원에서 나는 산모도 아니고, 누구누구의 어머니도 아닌 그냥 나 '000(이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참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마 내 문장의 주어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아기'라서 그런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주어는 아이일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가 많은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일의 중심이 아기이다보니 화장품 하나를 골라도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만져도 무해하도록 성분이 순한 걸 고르게 된다. 하지만 남편은 아마 다를 것이다. 회식이 있어도 아내가 있으니 마음 편히 갈 수 있고 아내가 아이를 볼 걸 아니까 늦잠도 잘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남편에게 아이는 분명 주어는 아닐 것이다. 


동사의 자리는 무엇일까. 내 삶의 동사는 무엇일까. 혼자였을 때는 이 동사는 나 혼자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지만 가족이 생긴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마 나의 동사는 남편과 아이가 합쳐진 그 무엇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 이 동사 자리는 확실하진 않다, 사실. 


# 엄마도 자라고 있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삶은 다채로워지고 복잡해지고 여러 빛깔을 보일 것이다.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졌다가 그 문장에 부사가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내 문장은 화려해졌고 재미있어졌고 맛깔스러워졌다. 그러다 새로운 주어가 내 자리를 차지했다. 원래 있던 나라는 주어는 새로운 주어인 아기에게 내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문장에서 동사가 새롭게 들어섰다. 그럼 이 전의 주어인 나는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까. 아직은 혼란스럽다. 언젠가는 다시 주어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주어 자리를 아이와 함께 쓰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건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나도 엄마가 '되어 가는 중'이니까. 이렇게 어리숙한 엄마가 조금은 덜 어리숙한 엄마로 자라나고 있는 걸 테니까, 아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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