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봄을 느끼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대충 말하지 않아요. ‘봄’이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아요. 대신 봄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을 접촉하려 하죠. 얼음이 풀리는 현장으로 다가가, 풀려 가는 얼음에 손을 대 봅니다. 새싹이 돋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찾아가 풀어지는 땅의 온기를 살갗이나 코로 직접 느낍니다. 봄을 그저 ‘봄’이라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죠.(최진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p283)”
여름을 느끼고 있다_ ‘여름이다’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기 위해서, 여름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을 접촉하기 위해서, 여름이 사는 이 곳에서 여름을 느끼고 있다. 여름을 나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름을 본다_ 작년의 나는 처음으로 여름을 '보았다'. 오랫동안 햇볕 아래 있던 내 손과 팔에 여름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으로 '눈으로' 여름을 본 것만 같았다. 오늘, 신호등에서 여름을 문신처럼 새긴 한 사람을 '보았다'. 양말 자국이 선명히 남은 슬리퍼 속 발. 그의 발에는 여름이 새겨져 있다. 여름을 만난 또 다른 사람도 보았다. 이번 여름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듯한, 민소매의 새 하얀 팔. 이제 저 팔은 여름을 만날 게다. 아니 지금 만나고 있다.
여름을 듣는다_ 여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햇볕을 피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아본다. 여름의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된다. 우렁찬 매미 소리가 들린다. 7년간 땅 속에 있다가 고작 2주 동안 바깥 생활을 하고 일생을 마감한다는 매미 이야기가 떠오른다. 매미의 울음 소리에서 삶에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삶의 이유, 존재를 이유를 물어대고 있는 내가, 매미의 울음 소리 앞에서 작아진다. 길가의 나무가 소리를 낸다. 사각사각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나뭇잎이 울창한 여름이기에 나는 소리다. 여름의 소리다. 자동차 소리마저 바람소리와 합주를 이루는 듯 시원하게 들린다. 도시의 여름 소리다.
여름을 생각한다_ 공원의 풀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겨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틈새 있는 곳곳마다 빼곡히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 마치 제각기 자신의 아름다움이 최고라며 뽐내고 있는 것만 같다. 문득 퇴근 쯤에 들은 젊은 동료의 말이 떠오른다. 눈썹 문신을 했다면서, 이제 자존감이 올라갔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그의 눈썹 숱이 적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뿐 아니라 사무실의 그 누구도 몰랐단다. 어쩌면 자기 자신만이 아는 콤플렉스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썹 문신으로 자존감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함박웃음을 짓는 그의 밝은 얼굴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를 본다. 나는 그랬다. 사랑에 빠지면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혼자일 때는 아무렇지 않던 것들인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나의 단점들이 자꾸 크게 보였다. 그래서 더 예뻐지고 싶었고 더 꾸미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그 옆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자존감을 올리고 싶었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시작되는 연인의 얼굴을 본다. 여름의 얼굴이다.
하늘빛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푸르른 공원을 보며 생각한다. 여름은 이십 대의 얼굴이다. 여름은 시작하는 연인의 얼굴이다. 여름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가지고 싶어 끊임없이 욕망하는 탐욕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욕심조차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나를 잃는다. 나에게 여름은 그렇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