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느 날의 단상

by 유정

펜벗,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_ 최진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서평을 쓰려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꺼내 들었다. 당신이 나에게 이 책을 권한 이유를, 펜벗과 편지를 주고 받던 그때의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문학에 관한 책인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으며 알았다. 내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크게 흔들렸고 그 마음을 서평으로 쓰고 싶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쓸 수 없었던 이유를. 쓰지 못했던 것은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끙끙 거리며 풀지 못했던 수학 문제를 간신히 풀고나서 엄마에게 자랑하듯, 오랜만에 펜벗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당신이 내게 권한 이 책,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라고. 몇 번이나 마음의 편지지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이렇게 나에게 쓰고 있다. 펜벗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나에게 쓰고 있다. 아마도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고 해도 그건 나에게 쓰기 위한 편지일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수신인’으로서 필요한 것일뿐, 새로 보게 된 것을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나를 멈추게 했다. 점을 선으로 긋는 일은, 이제는 하지 않으려 한다.


점을 선으로 그리다_ 점을 선으로 이으려고 하던 때도 있다. 십 년도 더 된 예전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것은 사람의 손으로는 그을 수 없는 선이란 생각을 한다. 반대로 선이었던 것이 점이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선 자체가 지우개로 지워질 때도 있으니까.

늘 처음이란 단어 안에 끝을 넣고 살던 나인데, 이제는 그 끝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끝이 선택이 아닌 당연함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작정하든 안 하든 끝은 반드시 오고, 그 끝이 언제 오는가의 차이만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 그런 영리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그 시기가 만든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삼십 대 중반이 되서야 처음 들어간 첫 직장. 계약기간은 다 되어 가고, 새로운 직장은 아직 미정이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 중에 전 직장 사람들과도 교류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첫 직장의 동료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선으로 잇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하며 외국 친구들을 만들어 귀국하고 싶은 마음에서 점을 선으로 잇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그렇다. 그런 노력들이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유명사인 당신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나’를 보기 위해 일반명사인 당신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처럼.


김애란의 글_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여전히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단편은 조금씩 읽고 일기장에 짧은 느낌들을 적고는 있지만 아직 불명확하다. 소설은 물론 단편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던 나. 그래서 인지 아직도 이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낯설다. 하지만 좋다. 좋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

그녀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녀가 그 글을 쓰는 모습, 그 글의 소재를 찾기 위해 거쳤을 시간들을 떠올리고 만다. 그러면서 랩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문장의 속도에 휘청인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드문드문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온다면 좋으련만 미쳐 주워 담지도 못할 만큼 끊임없이 나를 멈추게 하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단편이지만 장편을 꼭꼭 쥐어짜서 단단하게 만든 덩어리 같다. 너무 단단하고 견고해서 조사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그 견고함에 언제나 감탄한다.


그녀의 단편 중 하나인 ‘침묵의 미래’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오늘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언어로 얘기하다 하나뿐인 죽음을 맞이한 누군가를 떠났다. (...) 그는 아흔두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할말이 있다는 듯 허공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의 유일한 화자이자 청자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모어에 대한 이런 표현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에게 모어母語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 마음을,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생각 또한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소화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쓸 수 없다는 것. 그런 이유들로 쓰지 못하고 보낸 책들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

끝을 모르는 시작_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 배운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기본적인 인사말, 문자 익히기 정도지만 말이다. 회사의 러시아인 부장님과 회의로 일주일에 한 번씩 뵙는다. 십 년 이상 이 회사에서 일하시고 계시고 남편 분이 한국인이셔서 한국어를 상당히 잘 하신다. 굳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울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그 분을 뵐 때마다 ‘안녕하세요’ 정도는 러시아 말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안녕하세요’나 ‘잘 지내요?’ ‘네 잘 지내요’ ‘이름이 뭐예요’ 등을 한 마디 씩 외워나가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그 정도의 인사말은 러시아어로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인사말을 건넬 때 부장님의 표정은 지금까지 뵈 온 얼굴 중에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아직은 나의 러시아 인사말이 어떤 무게인지 나는 모른다. 내 입으로 발화하지만 나에게는 이 언어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혼자서 발음하고 연습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그 분의 표정을 보며 나의 문자들이 무게를 갖게 되는 순간, 나는 내 언어의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시작하며 끝을 생각하지 않고 시작한 것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 나대신 큰 그림들을 그려준다. 러시아어를 배워서 여행하라든가, 책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익혀도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일부러 그런 말들에 나를 막는다. 이번 한 번쯤은 끝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좋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끝이나 견본이 없는 시작, 한번쯤은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목적이 없는 시작. 그저 마음의 소리에 순수하게 이끌린 시작. 끝이 언제 오더라도 그 또한 나를 책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작. 한 번쯤은 나에게 그런 선택을 주고 싶었다. 이 한 번은 앞으로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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