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과 영화 사이

by 유정

# 2017년 12월 27일


일기를 쓰기 위해 한글 문서를 열고, 날짜를 적고, 제목을 기다리는 깜빡이는 커서를 볼 때마다 작은 압박감을 느낀다. 그러다 순간 떠오르는 글자로 얼렁뚱땅 제목을 적고 나면 깜빡이는 커서의 압박보다 더 큰 숨막힘을 느낀다. 그것은 옭아맴이다. 어떤 내용을 적겠다는 의도 없이 일기장 파일을 열고 적으려던 것이었는데 제목을 적음으로서 나는 이미 한정짓고 만 것이다. 이러이러한 내용을 적을 것이다, 혹은 그러한 내용으로 쓰라는 무언의 숨막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 제목을 기다리는 커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얼렁뚱땅 제목을 적고 만다.


앞으로 4일. 2017년도 이제 4일 남았고 12월도 이제 4일 남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18년이 된다고, 1월이 된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의미 없는 제목으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나 자신만 있을 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서평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쓰고 싶은 마음은 그 책을 만난 순간부터 있었지만 쓸 수 있는 내가 없었다. 다시 읽고 또 읽고 책 속 구절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그리고 다른 책들로 마음을 옮기고 삶의 물이 베어들어 가던 이제야 비로소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나 완성하지 못한 채, 엉클어진 실뭉치를 이리저리 조물락 거리다가 내려 놓는 심정으로 한글 파일 문서를 닫았다. 하지만 이제 내 안에는 그 책이 가득차 있다. 모든 것은 그 책과 이어진다. 아마도 이미 난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실은 모양이다.


# 영화와 원작 사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도 함께 보았다. 571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두께와 탄탄한 줄거리, 인물에 대한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 책에서 나를 감동시켰던 이러한 수많은 요소들이 영화 속에서는 전달되지 않았다. 솔직히 실망이었다. 실망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영화는 원작을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책을 영화한 작품도 이어서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전달되었던 논리정연한 구조가 영화 속에서는 약간 변형되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했다. 역시나 실망이었다. 이제는 원작을 읽은 후에는 영화를 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내심 했다.


그러다 다른 영화들로 옮겨 갔다. 원작이 없거나 원작을 본 적 없는, 오로지 영화로만 존재하는 작품들. 내가 가 보지 못한 지구 저편의 모습 혹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과거의 한 때를 그린 작품들도 있었고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마치 나를 보게 만드는 영화도 있었다.


그러다 만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작품.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선택 기준은 오로지 그 뿐이었다. 내용도 몰랐다. 영화에 대해 무지하고 선택할 만한 사전 지식도 없었던 나에게 그 영화는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왔다. 나의 무료한 시간을 때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는 순식간에 흘러갔고 책을 읽을 때처럼 언어를 주워 모을 시간도 없었고 장면을 해석할 여유도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저 보았다.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그저 보았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하늘을 보는양,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을 집에 데려가고 싶다고 말하는 여주인공 조제. 그녀의 대사와 함께 화면은 구름을 보여주었다. 나는 조제가 되어 그 구름을 보았다. 그저 보았다.


세상의 이목이나 사회적인 편견 등을 무시하고 오로지 마음의 이끌림대로 사랑을 해 나가던 남주인공. 그는 두 다리가 불구인 여자 친구 조제를 집에 데려가 소개하려고 그녀와 함께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남주인공은 점차 현실을 느끼게 된 것일까. 가족들에게 그녀를 소개할 수 없음을 그는 느낀 것 같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배우의 입을 통해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주인공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대사는 없었지만 그 장면을 보면서 막연하게 느꼈다. 그들은 언젠가 헤어지고 말 것이라고. 가슴으로 느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언어화되지 못한 슬픔이라 더 아팠다. 내 이별처럼 공허했다. 시렸다.


어쩌면 그 순간 남자 주인공도 자신이 그녀를 떠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은 집에 데려가 그녀를 소개할 자신이 없는 것뿐이고 그게 미안해서 운 것뿐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종반부에 이르렀고 그들은 결국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녀에게 이별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을 나온 그는 드디어 꾹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한다. 자신이 도망친 것이라고. 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전에 보았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행복하게 여행하던 도중에 그녀를 안고 이유 없이 울던 그 장면.


그렇다. 그랬다. 영화는 책과 다르다.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까지 모두 언어로 드러내는 책, 독자는 언제든 자신의 속도대로 읽을 수 있고 언제든 되돌아가고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책.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한 번 시작되면 내 부주의로 놓쳤다고 해도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대사 없이 얼굴 표정만으로 책의 몇 페이지의 내용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랬다. 영화는 마치 우리의 삶과 같았다.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삶을 해석할 수도 없고 이유를 알 수도 없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영화의 끝이 나야 지난 장면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이유를 알 수 없다. 영화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었다.


#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것을 말로 전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한 남자는 말한다. '왜 모를까..'라고. 그 사람은 언어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언어화된 것이 아니면 보지 못했던 사람,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는 책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지식이었다. 이미지였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화는 원작만도 못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품고 영화를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게다. 보고 싶은 것을 찾고 있었을 뿐.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실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삶에 대한 자세도 그러했다. 나 자신에 대한 하나의 이상, 친구에 대한, 부모에 대한, 연인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이상을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끼워 맞추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볼 수 없었고 수많은 당신들을 볼 수 없었다.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나는 나를 괴롭혔고 당신들을 떠나보냈고 이해해 주지 못했다.


보고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야 조금씩 희미하게 느끼고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책에서 말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어떠한 해석도 분석도 비판도 없이 그저 바라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고.


지금 나는 당신을 그저 보고 있다. 당신의 생활, 생각, 행동을 그저 보고 함께 하고 있다. 예전처럼 그것을 이해하려 나를 다그치지도 않고 내 멋대로 분석도 해석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노력하지도 않는다. 노력이란 어떤 목적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내가 당신을 보려 하는 것은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당신을 보고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을 뿐이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 이해는 있을 수 없고 이해가 없는 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변하고 싶지만 기존의 생각들이, 지식들이, 편견들이, 고정관념들이 나를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보려고 한다. 나무를 보듯 하늘을 보듯 별을 보듯, 나는 나를 보고 있다. 너를 보고 있다. 세상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적고 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비로소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지금 내가 보는 것들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안다는 것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기에. 나는 보고 싶을 뿐이다. 온전히.

이전 04화여름 어느 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