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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2015)

이 책을 읽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은 평생에 손꼽을 정도로 잘 아프지 않던 내가 이틀을 꼼짝 않고 누워있던 날이다.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지진으로 몸이 흔들릴 것 같았다. 오로지 온몸의 통증에 나의 정신을 주던 그 날, 통증의 끝자락을 함께 한 책이다. 내 몸의 아픔 때문이었는지 이 책이 참 아프게 느껴졌다.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의 색깔에 따라 감동하고 공감하고 화내고 분노하고 침잠하기를 함께 했다. 그렇게 책을 덮은 것이 몇 주 전이다.


이 책을 덮고 제목을 들여다보았을 때, 왜 ‘스토너’인가라는 생각을 참 오랫동안 했다. 다음 날도 했고 그 다음 날도 그그다음 날도 했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삶의 모습인데, ‘너의 모습’ 이나, ‘우리 이야기’ 라는 식으로 일반화한다면 궁금증을 자아내어 더 많은 독자를 끌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서야 알았다. 이 책의 제목은 ‘스토너’이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을 보내고 이제야 서평을 쓸 수 있게 된다.


‘스토너, 자기 자신으로 삶을 살아낸 사람.’


나는 이 책을 이 한 줄로 말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스토너’여야 한다. 비록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을 지라도.


제목에 대한 궁금증에 이어, 이 책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참 오랫동안 고민했다. 잠들기 전 불 꺼진 방안에서 오지 않는 잠을 불러들이려는 마음과 함께 다른 한 구석에서는 스토너가 있었다.

그의 결혼, 그의 직장인 학교 안에서의 삶, 그와 딸과의 관계, 그의 교수로서의 열정, 그리고 공부에 대한 꿈 등을 떠올렸다. 어디부터 그의 삶은 잘못된 것인지, 아니 그의 삶은 잘 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그와 그의 삶 전체에서 일관적으로 풍겨오는 무기력과 무력과 식어가는 연탄재와 같은 느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간혹 그가 열정적으로 불타오를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아내가 그 열정을 차갑게 꺼버리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렇게 스토너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이 방을 비우고 싶다. 비우기 위해 서평을 쓴다.


이 책에는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이 나온다. 그와 그의 아내 이디스.

스토너와 그의 아내 이디스는 그들의 사랑과 결혼이 처음이었기에 무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각자의 삶에 서투르고 무지했다.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삶에 취하는 태도에서 그 둘은 확연히 달랐다.


두 사람은 무지한 상태로 결혼했지만그 무지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중략그녀는 그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을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있었다.(p96~97)”


스토너의 가장 가까운 스승 아처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중략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p54~55)


스토너는 이 말을 따라 살아갔을까. 이 말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그는, 그의 가슴은 깊이 받아들였을까. 적어도 그의 아내보다는 그러했을 게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틀림없이 알고 계셨을 텐데요. (중략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으니까요.

이제 당신도 익숙해지셔야 합니다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당신이 없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p81)


결혼 전, 스토너가 아내 이디스에게 고백하던 그 말이 '처음에는' 참 깊게 나를 감동시켰다. 하지만 이 고백의 말은 '처음'처럼 아름답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지금까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무런 억양 없이 책을 읽듯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었을 때조차, 그는 자신과 그녀가 타인(p77)”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신한다.


형식에 집착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 데면데면하고 예의바르게 서로를 대하던 그녀의 부모. 화가 나도 며칠 동안 예의바르게 침묵을 고수하고 사랑도 말 한마디로 표현하던 곳에서 살던 그녀. 어머니의 계획표대로 살던 그녀. 그녀의 이야기에서 그는 그녀의 도와달라는 간절한 호소(p77)”를 느낀다.


번역상의 오류가 아닐까, 라고 할 만큼 의아했던 것은, ‘타인’이라 느껴지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는 부분이다. 그녀의 도와달라는 호소, 연민은 사랑의 한 모습일 수 있지만 동질감이 아닌 이질감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은 물론 집에서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던 사람이 없던 그녀.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나 내면의 사적 공간으로 성큼성큼 침범한 그.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그는 침묵을 배웠으며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p107)”


그가 왜 자신의 결혼을 ‘실패’라고 말했을까. 사람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던 아내의 모습, 그러다 어느 순간엔 그 연기마저 멈추고 누구도 초대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도 않아서 퇴근 후 장을 보는 일까지 대부분 담당하던 그.


아기를 가질 때조차, 우리한테도 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p118)”는 아내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평소에는 그의 손길 앞에 차갑게 굳어버리던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굶주린 동물처럼 그에게 달려든다. 그러다 그 굶주림이 사라져 버리자 그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그의 손이 닿은 것을 참을 수 없다(p123)”고.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자신을 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저녁 늦게 이디스가 있는 아파트로 돌아가는 식이었다.(p116)”


그가 퇴근 후 돌아가는 곳은 그와 아내가 사는 ‘우리의 집’이 아니다. ‘이디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그의 자리가 없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그녀는 계속 침대에 누워 지낸다. 아픈 척하며 육아도 집안일도 모두 내팽겨 친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온 그 날조차,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당신이 주말까지 집을 비우게 되겠군요. (중략그럼 저는 에마 이모에게 이리로 와서 그레이스를 돌봐달라고 부탁할게요.(p148)”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에게 하는 첫 마디는,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남편이 없는 그 며칠 동안조차 딸 그레이스를 보지 못하겠다고 이모를 불러야겠다는 ‘자신’만을 생각한 말이었다.


이기심을 넘어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이 불행하며 자신은 보호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모든 중심은 나여야만 하는 사람. 타인의 어떠한 아픈 소식을 들어도 그 상대의 아픔 그 자체를 공감하지 못하고,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거네, 라고 말하고 마는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감사의 거리보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질투하고 시기하며 갖지 못한 자신을 동정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행동이 나는, 극도로 싫다.


집을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거의 파괴적인 부담이 될 것이라던 윌리엄의 걱정이 곧 현실이 되었다.(p142)”


그녀는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빚을 내어 집을 사자고 주장한다. 그에게 서재가 생기고 아이가 뛰어놀 마당이 필요하다는 게다. 결국 그는 그러한 그녀의 말에 따라주고 만다. 하지만 그의 햇볕이 드는 서재는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아트리에로 바뀌고 그의 책들은 습기 가득 찬 좁은 창고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그 창고가 그의 서재가 된 이 후에도 그곳에 창고에 넣을 법한 물건들을 계속해서 가져다 놓는다, 그녀는.


그의 서재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가 그에게 그렇게 한 그녀만의 이유는 있다. 그가 딸의 육아를 혼자 담당하면서 그와 딸이 너무나 친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서재에 딸과 그가 나란히 앉아 함께 책을 보고 이야기 나누던 어느 날, 그들의 웃음소리가 서재 밖으로 새어나갔다. 그때, 그녀는 드디어 침대를 벗어나 서재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재에 있던 아이의 책상을 빼내고 서재는 창고로 옮겨 버린다. 그리고 아이는 이제 그녀의 계획표대로 살게 된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양육되었던 방식과 똑같이. 감정은 표현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는 늘 미소를 짓고, 보기에도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똑같이. 그리고 그렇게 스토너 자신의 삶의 이유와도 같았던 딸을 빼앗은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말한다. 딸아이가 불쌍하다고.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놀아주지도 않는다고.


그 뒤로 이디스는 그보다 간접적이고조용하고조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했다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p172)”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자라온 방식 그대로 자신의 아이를 키운다. 딸 그레이스는 아버지와 있을 때 보여주었던 지성이나 호기심, 천진난만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의 지금의 모습을 닮아간다.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아이에게 전해주는 그녀의 모습이 분노스러울 만큼 답답하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아내가 친정으로 가 있었다. 아내가 집을 비운 그때 스토너는 생각한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어쩌면 자신이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p158)”을.


그리고 그녀가 없는 그 동안, 그는 교수로서 강의를 할 때 몰입을 경험한다. 늘 자신의 수업이 부족하다 여기며 무능력함을 느꼈지만 그때만큼은 눈앞의 학생들과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강의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 또한 강의 후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는 기운을 얻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문학언어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조심스럽게그러다가 대담하게종내는 자랑스럽게.(p159)”


마치 꺼져가는 줄 알았던 연탄재에 다시 한 번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권태와 무기력감으로 일관된 그의 삶의 모습에서 열정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내비치는 순간이다. 그녀가 집을 비운 그 얼마간의 기간 동안, 그는 또한 이러한 사실도 깨닫는다.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p160)”


늘 삶이 이끄는 대로 휩쓸려 다니기만 하던 그였지만, 그에게는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기 바라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 결혼으로 인해, 아내의 존재로 인해, 그의 열정은 무참히 사라지고 만다.


사실 그녀도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녀 나름대로는 노력을 한듯 하다. 친정집에 가 있던 동안, 그녀는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외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문제는 외적인 변화라는 데 있다. 그렇게 자신을 바꾸고 오랜 만에 딸과 남편 앞에 나타나 자신의 변화를 '자랑'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껍데기' 변화는, 그와 딸의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이루어낸 내적인 변화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웠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p167~168)”


이청준의 <우리들의 천국>이란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한참을 방황했던 때가 떠오른다. 드디어 서평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찾아낸 답은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였다.

우리는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불행에서 나는 너를 끌어올릴 수 없다. 우울이든 불행이든 자기연민이든 그러한 늪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일어서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몫이다.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보듬어주고 응원할 수는 있지만 일으켜 세워줄 수는 없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불행에서 구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변화를 시도했을 때조차 더 깊고 중요한 중심이 아닌 껍데기를 바꾸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변덕스런 모습조차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지만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니라 그녀의 몫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나 아닌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응원이고 믿음이고 신뢰일 뿐이다. 그녀 스스로가 문제라 여기고 바뀌길 원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아내 이디스의 남편에 대한 횡포에 가까운 행동들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답답함과 숨막힘, 불행을 모두 남편의 탓으로 돌리는 그녀.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내 곁을 떠나는 것뿐인데당신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그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p177)”


그가 마흔 셋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불륜일지라도 처음으로 사랑이란 종착역이 아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사랑은 즐거운 것,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조차 아내는 말한다. 그래봤자 당신은 날 떠날 수 없는 사람인 걸 '안다'고.


그의 교수로서의 일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다. 자신의 신념대로 가르치고 살아왔지만 그것이 학교라는 사회에서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와 부딪히던 다른 교수가 윗자리로 올라가게 되면서 그 사람의 횡포로 말도 안 되는 기초수업만을 맡게 되고 시간 강사이자 제자였던 여인과의 사랑이 학교에 알려지며 그가 있을 곳은 더더욱 없어진다. 누구도 그에 곁에 오지 않고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으면 오히려 눈에 띄고 마는 존재가 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는, 혼자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중략결국은 모든 것이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궁극적으로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p251~252)”


나의 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당신의 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아무리 배우고 생각할지라도 그 배움이 오히려 생은 살 만한가라는 고뇌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배울지라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듯한 공허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를 더더욱 외롭고 힘들고 숨 막히게 한다.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하게 한데 뭉쳐서 흘러갔다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옷깃을 단단히 여미고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하지만 단단한 인내심과 무신경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몇 주를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p346)“


그의 삶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무력감과 권태감, 무관심이 느껴진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그 원인에 하나일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인간의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 그것이 스토너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딸아이가 어머니의 휘둘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여 어머니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방식을 취할 때조차 그는 죄책감이라는 편안한 사치품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p332)”고 말한다. 죄책감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그.


딸아이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시부모가 키운다. 딸은 술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딸은 말한다. 다음 주에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매주 다짐한다고. 하지만 항상 더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딸에게 아버지인 그는 묻는다. 너 불행하니?(p349)”라고.   

딸에게 ‘행복하니?’라고 차마 묻지 못하는 아버지, 스토너. 딸은 대답한다. 아뇨행복한 것 같아요어쨌든 거의 행복해요그래서 마시는 게 아니라...(p349)”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불행하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선 스토너. 사(死)의 언저리에 더 가까워진 그는, 옆에 있는 아내를 보며 생각한다.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후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략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그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p384)”


그리고 그는 남들 눈에는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우정을 원했지만 친구 한 명은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혼자를 원하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된 열정을 원하기에 결혼을 했지만 그의 결혼은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는 사랑을 원했지만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못하는 사랑이었기에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깊은 열병에 청각을 잃을 만큼 그는 아파야 했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학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p388)”


이 책의 제목이 스토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그는 스토너라는 자기 자신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홍길동, 헬렌 켈러 등의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위인’이 아닌 스토너. 한 사람의 삶을 살아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다. 삶을 무력하게 만들고 권태롭고 공허하고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스토너' 자신으로 살아왔다.


그의 결혼이 실패작이든 그의 삶이 영예롭지 못하든, 교육자나 학자로서 명성을 얻지 못하든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는 점일 게다. 성공하지 못해도 실패할지라도 상관없는 지도 모른다. 아니 삶에 있어서 성공도 실패도 없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던져진 삶을 묵묵히 ‘견디어’ 온 그, 그것이면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내 삶에 무엇을 기대했느냐고. 그 기대한 것들이 무엇 하나 나에게 뜻대로 되지 않고 무엇 하나 내가 그린 그림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끝까지 견디어낼 용기가 있느냐고.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삶에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다. 무엇을 ‘기대했는가’다. 삶의 시작이나 중간 지점이라면 ‘원하느냐’고 물을 게다. 하지만 죽음 직전인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말은 ‘무엇을 기대했는가’다.


이제는 내 마음 속에서 스토너의 자리를 비우고 싶다. 스토너의 삶이 너무 무기력하고 공허하다. 그에게 마음을 준 나마저도 그의 마음으로 물들어 있다. 그가 자신에게 물었던 것처럼, 나도 나 자신에게 살아야할 가치를 캐묻고 있다. 이제는 이 자리를 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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