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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최진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소나무, 2013)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듯한 그 막연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기에 막막했다. 그걸 찾지 못한다면 찾을 때까지는 ‘인생의 미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찾고 싶은 무언가를 드디어 이 책에서 발견했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 존재의 이유를 알고 싶고 세상을 제대로 보고 싶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 보고 싶다. 어제와 똑같은 실수와 어제와 똑같은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매일 새로 태어나서 오늘 처음 태어난 아이처럼 호기심과 감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사소한 일들에 기뻐하고 끊임없이 왜를 연발하며 매일 매일 세상을 배우고 싶다. 이것이 나의 욕망이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나로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나의 단점마저도 미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나와 함께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방법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 방법을 알아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알아야 오늘 하루, 남은 내 생을 온전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생사가 걸린 중요한 일처럼 여겨졌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생사가 걸린 중요한 일.


인문인간이 그리는 무늬


이 책은 한마디로 도대체 인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p19)”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다.


인문학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인문학이 오늘 우리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그리고 인문학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독립적 주체가 되는가즉 어떻게 내 삶의 주인이 되는가(p19)”


인문학이 무엇인가,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저자에 의하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기 위해서’이고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오랫동안 ‘살아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갈망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도 오랜 나의 숙제다. 만족스런 환경에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삶을 불행하다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알지 못한다. ‘살아서 정말 다행이야’‘삶은 정말 아름다워’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말해 본 적이 없다. ‘아 추워’, ‘아 졸려’라는 말처럼 그 말들을 내뱉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삶의 생생함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 있다. 이 서평을 쓰기 전까지 그 궁금증은 여전히 찾지 못한 답이었다. 서평을 쓰기 위해 끙끙대던 약 두 달 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그 느낌을 몰랐는지.


당신은 지금 무엇을 욕망합니까?(p197)”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p197)”


싫어하는 음식을 말할 수는 있어도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지는 못한다. 어디를 가도 즐겁게 놀 수는 있지만 그 어디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나에게 다가온다고 아무나 좋아하게 되진 않지만 내가 좋아서 다가가지는 못한다. 내 삶이 나에게 주지 않은 것들을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려고만 했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간절히 소망하거나 떼를 쓰거나 해 본적은 없다. 나는 나의 욕망을 알지 못했다.


행복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일치합니다.(p211)”


자신의 욕망을 진실하게 대면하는 것.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인문학이란, 결국 나를 알고 나의 욕망을 알고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며, 보아야 하는 대로가 아닌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선택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하는 것이며, 너를 위해 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며 일반명사인 ‘나’가 아니라 고유명사인 ‘나’, 개별적 존재인 ‘나’가 되는 것이며, 레이스 커튼을 걷어내고 세상을, 그리고 너를 마주하는 것이다.


나를 지켜 준다고 믿었던 신념과 이념, 가치관이 오히려 나를 구속하고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이유 또한 내가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모습, 나에게 부과된 주변의 기대 때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데리고 사는 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왜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 어려웠던가. 그건 내가 원하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놓고 그 틀 안에 들어맞는 모습만이 ‘나’이고 그에 맞지 않은 모습은 내가 아니길 원했기에 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신이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체계와 마찰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의향이나 경향과 억압들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거기엔 늘 모순이 있게 된다. 그 결과 그 체계의 이데올로기와 실존의 현실 사이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려고 하면서 당신은 자신을 억압하게 되는데, 사실 진정으로 참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다.(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물병자리, 2002, p26)”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또한 이렇게 묻는다. “책의 권위, 선생, 아내나 남편, 부모, 친구 또는 사회 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가(<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중 p26~p27)”라고. 책이나 선생, 아내, 남편, 부모, 친구, 사회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신념이자 이념, 가치관이다. 즉, 이러한 권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신념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니체도 자신의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적극적인 열정이 의견을 만들고 마침내 주의, 주장이라는 것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언제까지고 의견이나 주의, 주장에 집착하면 그것은 융통성 없는 신념으로 변해버린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왠지 모르게 위대해 보이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과거 의견을 계속 가지고 있을 뿐, 그 시점부터 정신 또한 멈춰 버린 사람에 불과하다. 결국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초역 니체의 말>삼호미디어, 2010, p175)”


즉 니체에 의하면 신념은 정신의 태만이 낳은 부산물이다. 왜 그러할까. 왜 죽은 지식이라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새로운 사건이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고정된 지식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며 과거의 경험을 해답지인양 들이대어 그 낡은 기준으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는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러했다, 그러니 너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라는 말. 혹은 예전의 너는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또 그러할 것이다, 라는 것. 이러한 태도로 인해 관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관계란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이미 있는 조건에 맞추어 세계를 해석하지 않고세계의 움직임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p153)”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 눈앞의 것들을 정말 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만난 후 이 문장은 나의 수첩으로 이사 왔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유난히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기억하는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문장이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것들 그런 것 또한 나에게는 많을 게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죽어야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살해’다. 여기서 자기 살해의 대상은 ‘가치와 이념으로 결탁된 자아’이다. 이 자아를 죽임으로써 세상을 낯섦과 생소함으로 바라보고 익숙함과 결별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는 지식을 버려야 나를 온전히 볼 수 있다.


내 수첩 뒤에는 노란 포스트잇 세 장이 붙어 있다. 그 위에는 책 속에서 모은 구절이 적혀 있다. 우리가 정말로 보고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의 상태가 된다, 아름다움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전적인 포기가 있을 때 존재한다, 사랑은 완전한 자기 포기가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라는 세 구절이다. 이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어떤 한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면(여기서 ‘제대로 본다’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신념, 즉 내 안에서 나오지 않은 사회적 판단, 가치관, 이념 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온전하게 그 상대를 온전히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상태이다.


여행_낯설음을 만나기 위한 시간


오랫동안 놓지 못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인상 깊게 읽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평을 쓰리라 마음먹고 있는데 아직도 쓰지 못한 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책상에 앉으면 언제나 한 번씩 바라보곤 한다. 왜 쓰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건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일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남자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몇 십 년간 쌓아온 경력과 일상을 벗어버리고 궤도를 벗어난다. 그가 원래 그런 성격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고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는 사람이며,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가벼운 기분전환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을 향한 모든 기대를 실망시키고 금기를 깸으로써 구제됐고, 등이 굽은 채 판결을 내리는 아버지와 야심만만한 어머니의 부드러운 독재와 평생 숨이 막히도록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생으로부터 해방되어 드디어 평화를 얻었다.

그는 또 스스로와도 화해했다. (...) 내부의 폭풍에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기고 그 폭풍과 하나가 된 지금, 대항하기 위해 보호벽을 설치해야 할 대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방해를 받지 않으며 세상의 반대편 끝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들녘, 2007, p498~499)”


그렇다. 자신을 향한 부모나 형제, 외부의 시선은 물론 자신이 자기에게 가했던 억압에서 그는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약 6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들녘, 2007, p39)”라고.


그레고리우스가 여행 끝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예전의 그는 아닐 것이다. 화석화된 명사의 삶을 살았던 그는 이제 동사의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겉보기에는 똑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부모나 아내의 기대도, 교수로서의 의무도 아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방법, 그건 별다른 게 아니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체계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욕망을 알게 되면 된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왜 욕망을 알아야 하는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욕망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바로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어떤 것(p73)”이며 나를 나이게 하는 어떤 것(p73)”이다. “‘내가 나인가?’라는 질문을 달리 표현한다면 아마 나는 내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가?’(p80)”이며, 욕망은 또한 “‘이곳에 있는 자기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힘이고 의지이며 충동이고 생명력(p82)”이다. 따라서 저자는 욕망이 거세된 인간은 '내'가 아니며 피가 흐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표현도 쓴다. 욕망, 원하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나타나는 실망이라는 감정.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저자는 실망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한다.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들녘, 2007, p292)”


나로 살아가다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기에 나의 글로 풀어내지 못했던 탓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나를 거쳐 갔던, 이 책처럼 내 안에서 풀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 있던 책들, 그 책들의 의미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한꺼번에 해석하게 되면서 그 무게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서평을 쓰며 알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산다는 것,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라는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서평을 쓰는 것이 그토록 버거웠던 게 아닐까.


저자는 ‘자기를 위해 산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 등의 표현을 쓴다. 나는 지금까지 적어도 내 일에 관해서만큼은 내 욕망에 충실했다. 급여나 복지 조건, 안정성보다는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을 우선시하며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 왔다.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것에 대해서는 욕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떼쓰는 법도 모른다. 떼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은 가정환경 탓으로 생각해 왔다. 한 가정의 부모로서의 위치보다 자기 자신의 존재, 욕망에 충실했던 부모님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만족스럽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뜨곤 한다. 그로 인해 자식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정말 모르시는 것일까란 생각이 결국 참지 못하게 만든다. 아버지 자신의 인생에서는 만족하셨을지 모르지만 세 자녀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는 과연 만족하실 수 있는 삶이었을까. 그런 나의 과한 기대, 요구, 이상이 오히려 나를 결혼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나는 누군가의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원하는 일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 누굴 책임져야 되는 입장이 아니니까 나는 그래도 되지 않는가 라는 변명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만났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 책을 만났다. 혼란스럽다, 사실, 지금도.


저자의 생각들에 대부분 수긍하면서도, 일부분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따르는 삶’이 정말로 괜찮은가,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삶이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는 않을까란 의문을 품게 된다. 정말로 기존의 지식, 이념, 가치관을 없애도 되는가. 물론 과거의 낡은 그것들이 없을 때 매번 새롭게 세상을 볼 수 있고 너를 볼 수 있기에 매번 신기하고 아름다울 게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모두 잊어도 되는가 라는 불안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안다. 알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고 보이는 대로 온전히 세상을 보고 싶고.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영원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고 불안, 안정, 완벽에 대한 두려움도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알고 싶다. 나라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알고 싶다. 내 기존의 지식과 가치관, 사회적 시선 등의 이유로 나는 너의 손을 놓아 버렸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유품이 다시 너를 나에게 보냈다. 너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기적인지 한때의 추억이 될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동선이 모두 그려진 이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일 뿐이다. 불안과 불완전을 감당하고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것, 구체적 일상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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