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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니체의 <초역 니체의 말>(삼호미디어, 2010)

당신이 알던 나는 죽었다


사람은 변한다. 당신이 알던 나는 죽었다. 죽었기에 지금의 나는 살아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예전의 나는 이 책처럼 주은 문장으로 이뤄진 책은 좋아하지 않았다. 내 눈으로 읽고 내가 주은 문장만을 읽고 싶었다. ‘예전’의 나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나는 죽었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읽기 전과 읽은 후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이는 책우리들을 이 세상의 저편으로 데려다 주는 책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맑게 정화되는 듯 느껴지는 책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선사하는 책사랑과 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새로운 관점을 안겨주는 책.(p222)”


읽기 전과 읽은 후에 세상이 달리 보이는 책,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선사하는 책,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는 책. 이 책은, 니체의 생각은, 나에게 그러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평을 쓰고 있다. 쓰지 않으면 나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다자신 또한 본인과 비슷한 사람들을 칭찬한다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장단점도 알 수 없다그리고 자신과 어딘지 닮은 상대를 칭찬함으로써 왠지 모르게 자신도 인정받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어들기도 한다결국 인간에게는 각각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그 수준 속에서 이해와 칭찬이라는 우회적인 형태로 자기 인정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p113)”


우회적인 형태로의 자기 인정. 이 단어가 나를 멍하게 만든다. 나의 독서의 이유가 이 안에 있었다. 나는 늘 언어와 문법이 통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 듯싶다. 그렇게 언어와 문법이 통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 자신을 이해받고 인정받고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니체를 통해 나는 나를 알게 되고 너를 알게 된다. 역시 서평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지를 만든다’라는 개념에 대해 품고 있다.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나뿐이라고 믿으며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이라 굳게 믿던 시절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주관을 갖고 그에 맞는 것만을 바라본다면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넘어져도 그러한 강한 무언가가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과거의 나’가 되었다. 그런 강한 신념과 기준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고인 물은 썩을 뿐이다.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p175)”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위와 같이 말한다. 자신만의 의견, 주의, 주장에 집착하면 그것은 ‘융통성 없는 신념’으로 변질된다. 한때 집착했던 것이 ‘변함없음’이었다. 변함없는 사랑, 변함없는 믿음, 변함없는 성실함, 변함없는 젊음... 수많은 ‘변함없음’에 대한 집착이 점점 나를 숨막히게 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변함없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정말로 변함없는 것은 좋은 것인가란 의문도 든다.

변함없는 사랑. 사랑 또한 그렇다. 이미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당신 또한 당신과 나의 관계 또한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하루만큼의 경험이 우리 안에 나이테처럼 새겨져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과 똑같은 방식의 사랑을 원한다.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와 어긋나면 틀린(‘다름’이 아니라) 것이고 나의 옳음과 다르면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좋은 일나쁜 일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어떤 식으로든 해석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해석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결국 해석에 사로잡히고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시점에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요컨대 해석 또는 해석에 기인한 가치 판단이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이다그러나 해석하지 않고서는 상황을 정리할 수 없다여기에 인생을 해석한다는 것의 딜레마가 있다.(p34)”


나의 삶은 ‘언어, 글, 문장’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언어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나지만(어쩌면 그런 ‘나’이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요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무언가를 하나의 언어로 표현하면(해석하면) 그 무언가를 그 단어라는 통 안에 넣어 버린 게 되어 다시 꺼내기 힘들어진다. 니체도 말한다. 해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는 상황을 정리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나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념이 없으면 이러저리 흔들리지 않을까. 해석하지 않고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담을 수 있을까. 니체는 이 질문에 대해 획일화된 철학을 갖기 보다는 철학을 갖기보다는 때때마다 인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 낫다그 편이 일이나 생활의 본질을 명료하게 볼 수 있(p236)”다고 말한다.


요즘의 나는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일련의 저서들도 니체의 생각과 비슷하다. 어떠한 비난이나 비평도 없이 관찰자라는 제 3자가 아닌 대상과 하나가 되어 보라고. 그것은 비움과도 같다. 그것은 죽음이기도 하다. 과거의 지식, 경험을 통한 앎, 판단, 그러한 과거의 것을 버리고 죽어야만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나무를 보며 ‘나무’라고 이름 짓는 순간 우리는 나무를 보지 못하게 된다.



삶의 질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을 향해 던지고성실하고 확고하게 대답하라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이들 질문에 대답하였을 때 자신의 본질이 뚜렷해질 것이다그것이 바로 당신이다.(p35)”


참 한참을 들여다본 문장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의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무엇에 몰입하였는가? 수첩에 적고 일기장에 적고 마음에 적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적었다. 언어와 글.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 이것이 나의 답이었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p184)”


그렇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이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그 소유를 위한 경쟁을 위해 주어진 시간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소유를 위해 사용한다. 지금 이 시간 자체가 아니라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위해, 닿지 않는 하늘의 별에 손을 뻗기 위해 끊임없이 발돋음 하고 있다.


이 문장 또한 한참 마음을 빼앗긴 문장이다. 나의 이 인생이라는 시간은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일까. 이 질문은 나의 오랜 질문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왔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삶의 질문을 니체를 통해 다시 꺼내어 본다. 태어남에 이유는 없다고 많은 책들이 말하지만 나는 이유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유 부여가 될지라도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싶고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세상에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이 인생을 나는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 나의 존재의 이유 또한 들어있을 것만 같아서, 이런 문장들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쭈그려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듣고 싶었던 그 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상과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p257)”


당신이 사랑과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기를당신의 영혼에 깃든 고귀한 영웅을 버리지 않기를당신이 희망의 최고봉을 계속 성스러운 것으로 바라보기를.(p259)”


나는 이제 닿지 않는 저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발돋음에 지쳤다. 나는 분명 나의 손뻗음이 별을 향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작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의 입장에서 나에게 그것은 별처럼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제 손을 뻗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입버릇처럼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내일 죽어도 후회나 미련은 없다고. 너무나 열심히 살아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은 아니다. 앞으로의 내 생에서 가장 젊고 가장 건강하고 가장 행복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런 오늘을 나는 살았기에 설령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내 안 어디에서는 어쩌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건 결코 닿지 못하는 별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계속 손을 뻗어도 된다고 말이다. ‘나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말라는 니체의 말에서 온도를 느낀다. 체온이 느껴진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어스름해질 무렵 죽음이 찾아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작할 기회는 늘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그리고 이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이상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나 말끔히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다마치 놓게 변한 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사라지듯이당신이 열심히 행동하는 동안 불필요한 것은 저절로 멀어지기 때문이다.(p64)


나를 너에게 다가가게 했던 말이기도 하고, 너에게서 멀어지게 하기도 했던 이 말.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는 말. 내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늘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내일이 있다면 오늘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말이다. 하지만 너는 말했다. 나보다 짧은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고민하고 주저할 만큼 인생은 길지 않아, 라고.


니체는 말한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이상, 불필요한 것들은 털어버려야 하며, 그 불필요한 것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듯 저절로 멀어진다고. 저절로 멀어진 많은 것들을 생각해본다. 그것들은 나에게 있어 ‘불필요’한 것이었던 것일까.


아침놀


화가는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하늘을 손 안에 있는 물감의 색만을 이용해 다 표현해 낼 수는 없다그러나 캔버스 속 풍경 전체의 색조를 실제 자연이 발하는 색조보다도 낮추어 표현하면 그러한 하늘을 그려낼 수 있다주변을 어둡게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늘이 밝게 빛나는 듯이 보이게 하는 것이다.(261)


니체의 ‘아침놀’의 한 구절이다. 내 손에 들고 있는 물감의 수는 몇 가지 안 되지만 내가 가진 이것만으로도 나는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내가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그것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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