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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Jun 19. 2019

관객과의 대화 중인 D씨


"말씀해주신 거랑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그만큼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다보니, 일단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거든요. 기존의 의도는 대본으로 정리되어있고, 연출의 방향은 스태프들과 의논해서 현장에 준비되어있지만 사실 실제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정말 몰라요. 그 모든 필연과 우연이 겹쳐져서 카메라를 통해 필름, 아 아니 이젠 데이터로 남게 되죠. 나중에 편집하겠다고 그걸 보고 있으면 진짜." D 감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망했다 싶어요." 좌석에 앉은 관객들의 웃음 소리가 작은 파도처럼 번져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으니까. 다 찍긴 찍은거니까. 자르고 붙이고 음악도 넣고 소리도 넣고 CG도 넣고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런 수많은 시간들이 지나서 영화를 완성해놓고 나면 사실 잘 생각나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씩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해요. 처음의 의도와 생각들이. 아, 질문이 이게 맞나요? 죄송합니다. 여튼 그렇게 깊게 생각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걸 의도로 찍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긴 조금 어렵긴 하네요. 죄송합니다. 횡설수설했네요."

질문을 던졌던 관객은 앉아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D 감독도 고개를 숙였다. 사회자는 다음 질문하실 분! 이라며 마이크에 말했다. 소리는 영화관을 메웠다. 사람들의 눈치와 숨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좌석 중간에서 커플이 일어났다. 뒤에 다른 일정이라도 있었던걸까. 몸을 숙인 채 조심스럽게 관을 빠져나간다. D 감독은 머쓱하게 그 광경을 보고있다. GV는 영 불편하다. 좋아했던 적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본인이 관객이었던 시절에도. 하지만 영화사에서 홍보차 필요하다고 억지를 부렸다. 어쩔 수 없었다. 흥행에 필요한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그나마 다음 영화를 또 기대해볼 수 있으니까. 자기 작품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 내놓기 전이 가장 괴롭다. 가장 힘들다. 자신감도 가장 떨어진다. 세상의 목소리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네, 저기 구석에 계신 분."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사회자는 얼른 발견하고 진행요원에게 눈치를 보냈다. 진행요원은 마이크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마이크를 넘겼다. "네, 질문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영화를 처음 봤는데요. 되게 좋았어요. 잘 봤습니다." 마이크를 든 관객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목례 했다. 감독은 "감사합니다." 라고 마이크에 대고 말한 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질문이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영화를 보고 나서 여운이 남는 장면이 있어서요. 그냥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영화 중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몇 번 나오는데요. 저는 그 장면들이 짧지만 되게 인상이 강했어요. 혹시 그 장면에 대해서 해주실 말이 있을까요? 질문이 너무 막연한가요. 아 죄송합니다. 두서가 없네요."

"어떤가요, 감독님?" 사회자가 D 감독에게 질문을 토스했다. "굉장히 강렬한 장면은 아니지만, 영화 내에서 배역이 죽은 친구, 혹은 죽은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있었죠. 그 장면에 특별한 의도나 의미가 있었을까요?"

"글쎄요." D 감독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조용히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극장 안에 들숨 소리가 울렸다. "이건 사실 제 생각인데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추억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자꾸 피해서 생각하죠. 그걸 피할 수 없는 건 분명한데 자꾸 도망쳐요. 감정을 마주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머리는 알고 있고, 가슴도 울리지만 그걸 마주하기 힘든거에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지 모르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저는 그게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감정을 잘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지 못하고 마주해야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죠. 또 그런 사람도 있어요. 아예 감정을 쏟아내고 드러내고 표현해버리는 사람. 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이 터트리죠. 그게 가끔 폭력적일 때도 있어요. 스스로를 향할 때도 있고 타인을 향할 때도 있죠. 자기도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죠. 아마 너무나 강한 감정이기 때문에 휩쓸려 버리는 것 같아요. 때로는 옛 생각에 젖어 웃기도 하죠. 욕하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다시 또 울기도 하고요. 시간이 흘러가며 조금씩 옅어질 떄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떠오르면 비슷한 순간이 반복되죠.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에게 쏟아지는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표현하고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사람인거죠. 그게 맞다기 보단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 저는 그런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이 영화에서도 배역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배역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방법?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넣은 장면이에요. 그렇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네요.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면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걸까요? 그런 경우도 있겠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맞아요." 마이크에 목소리가 울렸다.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D 감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맞는 것 같아요." 작게 한 번 더 말하고 그는 진행요원에게 조용히 마이크를 건넸다. 

"네, 질문 감사합니다. 감독님 답변 감사합니다." 사회자가 관객석을 보며 말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만 하나 더 받아보고 좀 더 함께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보았지만 올라온 손은 없었다. D 감독은 방금 질문을 던진 사람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회자를 보았다. 사회자는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극장의 문을 보았다. 굳게 닫혀있었다. 위에 비상구 표시가 살짝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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