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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Aug 16. 2019

지금도 계속 되는 비극 <체르노빌>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 거짓을 위한 거짓, 진실 속에 묻힌 생명들


#미드


왓챠플레이에 <체르노빌>이 떴다.

우연히 친구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알게 됐다.

왓챠플레이를 사용하고 있지만 자주 들어가진 않았던 내 자신을 발견, 언제 쓸지 모르지만 계속 물을 틀어놓고 있는 것 같은 구독 시스템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인지. 하지만 그렇게 구독하고 있으니까 이런 명작을 바로 볼 수 있는 거 아냐! 라는 자기 합리화로 완성. 이렇게 된 이상 끊을 일은 없겠다.


사설이 길었지만 결론은 <체르노빌>을 볼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는 것.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은 실제로 체르노빌에서 있었던 인류 최대, 지상 최대의 무시무시한 사고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편당 약 1시간 살짝 넘는 길이, 총 5편이다. 미국에서 공개된 이후 엄청난 몰입감과 연출, 연기 등으로 시끌벅적했었다. 나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찾아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HBO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서 자막없이 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 포기. 잠깐 잊고 있던 사이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출처: IMDB 작품 소개 페이지)


자꾸 만나기 전 별 것 아닌 소소한 우여곡절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건, 그만큼 나에게 충격적일만큼 굉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연출, 스토리 이런 건 당연히 훌륭하니까 훌륭할테고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해서 조금 정리해볼 생각이다. 전문적인 것은 전문가들이 하겠지.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여러번 들어봤다. 제대로 조사하거나 공부한 적 없다. 많은 이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이미지만 있다. 원자력, 핵 관련된 발전 시설에서 큰 사고가 났고 그 주변은 유령도시가 되었다. 어릴 때 굉장히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본 기억이 난다. 미스터리를 보여주는 방송 같은 곳에서, 체르노빌 주변 지역에서 암 환자들과 기형아들이 많이 나왔고 동물들도 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인류의 비극, 핵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도시전설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 있는 일인건 알았다. 다만 뭔가 와닿지 않았다. 그 안에 사람들이 있었을테지만, 계속해서 결과들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것에 위화감이 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일이 있었대, 라고 기억되고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게 빠져있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만약 내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단순히 과거에 어떤 순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소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내 삶에도 어떤 진동이 오게 될텐데. 그런 갈증. 뭔가 막연한 먹먹함. 감춰진 무엇인가에 대한 위화감. 그것이 모두 <체르노빌>에 담겨있었다.


사람은 실수투성이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 실패하고, 그 실패를 통해 나아간다. 사람이 모여 집단이 되고 그 집단이 시스템을 이루면 사람은 시스템에 기대게 된다. 시스템은 누군가에게 권력을 주고 부를 주고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좇기 위해 시스템에 순응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 실패한다 우연이거나 혹은 필연적으로. 처음은 작을지 모른다. 별거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은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집단은 집단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탄생시킨다. 실수가 거짓으로, 때로는 의도적인 실수로, 결국 필연적인 실패로.


사람이 악독해지는 건 자기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어떤 장막이 생길 때라고 생각한다. 그게 때로는 '정의'일 수도 있고 자신이 대변하는 '집단'일 수도 있다. '회사'가 되기도 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이나 '인기'일 수도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은 채 밀고 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 물론 이게 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를 지킬 때 비로소 강해지는 것도, 용기를 얻게 되는 것도,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이나 집단을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결국 그 비극 아래에는 사람이 있다. 개개인의 삶에 비극이 실체를 가지고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삶에 비극이 잠식하게 된다. 인생 전체가 비극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희생을 강요당한다. 살 곳을 잃고, 가족을 잃는다. 희망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되는 것도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무얼 상상해야 맞을까?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이게 옳다는 판단을 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맞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드라마 안에서는 악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 당사자의 삶을 고민해본다면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던 건 아니었을까.


인류의, 지상 최대의 비극은 <체르노빌>이라는 미니시리즈를 통해 현시점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질문이 되었다. 여전히 내 주변에 불안한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 아니 면면히 드러낸다. 이건 단순히 체르노빌에서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문제고 나의 문제고, 너의 문제라고.



2019, TV 미니시리즈, 체르노빌

> 인간이 만든 것들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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