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커피 : 독립 마케팅 스튜디오의 넋두리 다이어리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과 스케줄이 있어서 나아가는 것 말고, 자의적으로 몸과 마음을 깨우기 위해선 산책과 커피만한 게 없다. 가벼운 산책 후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면 많은 것들이 정리되며 산뜻한 동력이 차오름을 느낀다. 아내와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살을 쬐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늘 그렇게 기분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속 걸리적거리던 일때문에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부정적인 순간의 감정을 다시 되새겨보기도 한다. 때론 괴롭거나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산책의 시간마저 없으면 너무 순간의 바쁨과 하루의 휴식에 매몰되어 도피하게 되기도 하니까, 산책과 커피를 통해 조금이라도 생산성을 회복하려 노력한다.
그때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하려 한다. 이는, 산책과 커피를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스스로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다.
최근 몇주 동안, 일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그 힘듦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가 없고, 오히려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지면 몰라도 나아질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이 힘들다는 건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이 없어서 생활이 힘들다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다. 일이 많고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많아서 하루하루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요몇주 주말이나 쉬는 날, 저녁이나 새벽도 가리지 않고 급하게 해야하는 일들이 있었고 최근엔 밤을 새는 일도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앞으로 몇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감사한 마음이지만 무척 괴로운 것도 사실이다. (젊을 때 밤 좀 새는 것 가지고 뭐! 라고 할 수 있지만, 지난 직장에서 몇년간 그렇게 일하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고 심리 상담을 받은 적도 있다. 환경 개선을 위해 다년간 노력해서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다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이 있다.)
내가 자처한 일이긴 해도 이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나는 문득문득 멈춰 서서 고민에 빠진다. 심장을 죄어오는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나 자신의 나약함에 손가락질하고 부족함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왜 자꾸 도망치고 싶고 괴로워 하는가. 그럼 어떻게 살고 싶은 건가. 내가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어떤 걸 꿈꾸며 퇴사 후 독립의 길을 가겠다고 겁없이 도전했는가.
우선, 몇 달 전의 태도에 대해서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 후, 근근히 받고 있던 프리랜서 일을 조금 더 확장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했다. 확장한다는 건, 회사 소속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업으로 일을 하겠다는 것이고, 단순히 프리랜서가 아닌 좀 더 확장된 형태의 소규모 팀, 혹은 회사의 모습을 꾸리기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에 하던 것처럼 기획이나 아이디어, 컨설팅 만으로는 힘들었다. 너무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일들이기에, 규모를 키우거나 안정성을 확보하기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하려고 했던 일, 하기 싫었던 일들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광고, 마케팅 일을 14년간 해왔다. 에어전시에서 AE와 카피라이터 일을 하다가 브랜드에 마케터로 들어간 이후로는 인하우스 마케터로서 기획, 운영, 전략 등의 일을 하며 간혹 카피라이팅, 기획, 아이디어 등의 외주 업무를 했다. 그러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오게 되니, 마케팅 과정 전반의 일을 통합적으로 하는 일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물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는 건 ‘운영, 제작’과 관련된 프로젝트 매니징 업무이다. 처음엔 이상하게 자신만만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 것들을 할 수 밖에 없지. 그리고 그걸 하지 않으면 안되지.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우선, 이건 개인적으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고통이라고 생각할 뿐, 이 상황이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시기라는 것에는 전혀 부인할 생각이 없다. 내 태도와 생각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남긴다.)
나오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너무나 감사하게도 같이 일을 만들어갈 수 있는 분들이 있어서, 좀 중장기적으로 (최소 올해까지는) 이어갈 수 있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하던 브랜드들에 덧붙여 3개 정도가 추가되었는데 모두 대기업의 일들이다. 아예 클라이언트의 카운터파트너가 되어서 직접 업무 내용과 방향을 관리하기도 하고, 프로젝트 진행을 주도하며 일정과 예산 관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끊임없이 쫓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엇에 쫓기냐고? 모든 것에 쫓긴다. 시간, 돈, 사람.
그래도 이젠 나만의 밸런스를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삶은 괴로움과 고통이 기본값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거기에 좀 더 힘듦과 어려움이 추가 된 버전이다. 기본적으로 힘든 거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살아가기 위해 돈이나 가치를 벌기 위해서 하는게 일인데, 그게 마냥 즐겁고 재밌을 순 없다. 삶은 결국 기본값으로 주어지는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성을 찾아가기 위한 길고 먼 여정이고,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발전과 자기 안정을 위해 나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선물처럼 행복의 순간이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모험의 끝에 발견되는 보물이 아니라, 끝없이 나아가는 길에서 자기도 모르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풍경을 보며 느끼는 희열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한발 한발 내딛어야 한다. 다만 그게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속도이며, 믿고 몸을 맡길 수 있는 방향이면 좋은 거겠지.
나는 충분히 더 나아갈, 더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참 편하게 살았나보다, 하는 생각에 빠진다. 일을 해야한다면 몰입해서 밤을 새거나 시간을 더 써서라도 해결해야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워라밸을 지키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어찌보면 현실의 혹독함과는 거리를 둔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배가 불렀다!) 대행사 생활 초반에는 당연하다는 듯 야근을 했다. 한달이면 28일을 출근했고, 회사에 있는 시간이 평균 12시간이었다. 약속을 잡는 건 당연히 어려웠고, 연차를 신청해본 적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 이제서야 조금 규칙적이고 내가 주도할 수 있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 다시 초반 라이프스타일로 돌아온 것이다. 대체 무엇때문에?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들이 많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하지? 안된다고 할 수 있을까? 꼭 해주셔야 해요, 안되면 안돼요, 라고 말하는 클라이언트를 오랜만에 마주한다. 나는 안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무시하고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하는 걸까? 최근 5-6년 동안의 나는, 그래도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해왔던 것 같다. 이제는 ‘안되는데 되는 방법’을 고민해야하다보니, 가장 먼저 나의 시간과 생각과 자존감이 갈리고 있다. 사실 그게 내가 가장 하기 싫었던 일 아니었나?
돈 때문인가, 생각했다.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 수입은 더 낫다. 하지만 수입을 낫게 하기 위해서 그만큼 희생하고 버려야 하는 일들이 진짜 많다. 견적도 확인하고 때로는 고집도 부려야하고 예민하게 굴어야하는 것들도 있다. 나는 일을 할 때 돈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이익을 줄여서라도 일을 진행시키는게 우선이라고, 자꾸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되다보니 나도 피곤하다. 그런 몇가지 태도들로 보았을 때, 나는 돈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돈때문에 일하는 것도 맞다. 무슨 말이냐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돈이지만, 일을 하는 이유는 꼭 돈뿐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 사이, 돈과 일에 대한 나만의 스트라이크 존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만족할 만한 돈의 정도와 규모는 얼만큼일까. 나는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불안감을 떠올렸다. 내가 돈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과 불만은 무엇인가. 부자가 되지 않을까봐, 남들보다 도태될까봐 불안했던 적은 별로 없다. 자만이나 자신감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잘나가는 건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까봐 걱정되거나 분노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나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행동했다가 나의 가족이나 식구, 내가 책임지고 있는 관계들의 삶이 힘들어질까봐 불안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을 죄어오는 고통이다.
바쁠 때, 아내와 강아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 도망가고 싶어도, 그들의 천진난만함과 안락한 집안을 보면 괜히 감상에 빠진다. 지키고 싶은 것, 내가 안전하게 유지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순간과 공간일뿐인데. 오히려 내가 스트레스에 빠져서, 가장 소중한 순간에 해가 되고 있다면 관계를 다시 전복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순간에 매몰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좀 더 길게 보면 이런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만들어낼 새로운 미래의 모습과, 이순간을 지나서 스스로 성장하게 될 나를 기대하며 나아가야할 필요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일이 없거나 이미 돈이 없어서 허덕이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문제라면, 사실 몸은 힘들지언정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나아가야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보면 고통의 원인을 1. 일의 양 2. 일의 질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1. 일의 양에 대한 문제를 짚자면 사실 이제와서 이걸 버리는 것이 무척 나이브한 태도가 될 수도 있고, 일이 많은 것 자체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일 수도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럼 2. 일의 질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든 이유는, 스스로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는 점이다. 해야하는 것, 안되면 안되는 것들 사이에서 시간과 사람에 쫓기면서 어떻게든 방법에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소모되는 것이 일이다.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없다. 심지어 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안해도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니 재미가 있을 수가? (딱히 일하면서 재미를 찾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아닌 삶 곳곳의 재미까지도 다 깎아내리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까 대행사가 다들 돈, 돈 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이렇게 소모되는데, 돈이라도 벌어야하는 것이다. 이걸 깨닫는 순간 앞서 했던 고민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나에게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닌데?
쓰다보니 조금 생각이 정리된 것 같다. 결국 ‘일의 질’에 문제다. 그리고 일마다의 부가가치를 늘려야 한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싫진 않다. 투덜대고 싶고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바쁘고 많은 것 자체가 너무 불쾌하고 괴롭고 힘든 것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기 싫은 일’ 혹은 ‘무리한 일’, ‘어려운 일’, ‘이해가 안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갈아넣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일의 질’을 바꾸지 못할거라면 스트레스의 축소를 위해 ‘일의 양’을 줄이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하반기에는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 시간을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벌써 상반기가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상태로 간다면, 하반기에도 제대로 하는 것 없이 계속 흘러가게 될 것만 같다. 말이 흘러가는 거지, 거의 장마 때 계곡 리프팅하는 것처럼 휩쓸려가며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모든 사람이 리소스의 한계와 마음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와 배려나 관계적인 안정감만 있다면 사실 일의 양에 대해선 그다지 민감하게 보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맞는 것 같다. 결국 일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하는 문제라는게 명확해 보인다. 그걸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2월부터 시작해서 3개월 간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처럼, 결국 나의 태도가 명확하다면 조금씩 변화할 수 있을거라고 본다. 되도록 조금 더 내가 바라는 삶에 가까워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에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힘들수록 함께 얘기나눌 사람이 절실하기도 하다. 혹시 이걸 읽은 분이 있으시다면 묻고 싶다.
Q.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멘탈이 흔들린다. 당신이라면?
1. 일을 줄이고 자신의 밸런스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나에 맞는 생활을 만든다.
2. 힘든 시기는 결국 지나간다. 물 들어올 때 최대한 헌신하여 나아간다.
오늘의 산책과 커피는 괜히 무겁고 또 길었다. 다음엔 좀 더 가볍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