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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Dec 26. 2023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냥 주절주절 떠들어보는 시간



뭔가 대단한 얘기를 써야할 거 같고, 목적이 있는 글을 써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서 글을 쓰지 못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고 느낀 지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뭐가 되지 않더라도 하다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되기 전에 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아니면 어떤 생각이나 계획, 기획이 완성되어야지만 해야한다는 생각 같은 것. 이것은 완벽을 추구하기 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여전히 어떤 부재를 지적하며 시선을 돌려서 피해가는 게으름의 함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쓰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 그건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대화는 많이 하면 할수록 공허함을 남긴다. 후회되는 일도 많다. 말로 꺼낸 이야기들은 부정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글은 계속해서 쓰고 싶고, 남기고 싶고, 쓰면 쓸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라도 준다. 그것이 빌렘이 말했던 '글 쓰는 몸짓'에 나오는 쓰는 사람의 숙명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기도 한다.


여튼 연말을 앞두고 그냥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본다. 일기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다. 배설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냥 나 자신과의 수다에 가깝다.


1.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또 보았다. 

정확히 두번째 본 것이다. 원래 제목은 '리틀 미스 선샤인'인데, 우리나라는 미인대회 타이틀의 경우 '미스'라는 말이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늘 하던 생각이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고민이 아니었나 싶다. 그정도로 영향을 받을 영화도 아니고, 덕분에 헷갈리기만 할 뿐이다. 여튼 한글화 된 제목에 논란이 있는 영화들은 더러 좋은 영화인 경우가 많다. 혹시 제목이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걸작은 되지 못할지라도, 준작 정도 하는 작품이 나올 경우 어설픈 제목을 붙이는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우스운 생각이다. 그런 영화들을 떠올려보자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등이 있다. 이렇게 적고보니, 번역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샜다. 

여튼 '미스 리틀 선샤인'을 다시 본 이유가 있다. 나는 누군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꼭 '미스 리틀 선샤인'을 이야기하곤 했다. 딱 하나만 짚는 경우는 없었다. 시기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한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을 꼽는다고 말하곤 했다. 조건부 승인, 같은 느낌이랄까. 전쟁 영화는 별로 안좋아해요. 마블 영화도 좋아하죠. 그래도 가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도 있어요. 뭐 좋아하냐고 물으면... 이라고 하면서 대답을 하는 식이다. 그 안에 들어가는 영화들이 여러개 있는데, 잊지 않고 말하는 영화가 바로 '미스 리틀 선샤인'이었던 것.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났다. 내가 진짜로 그 영화를 좋아하는게 맞을까? 지금도 그 영화가 좋을까? 어떤 좋은 영화들은, 감독의 작품을 찾아서 보기도 하고 계속 여러번 보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하고는 하는데, 생각해보니 '미스 리틀 선샤인'은 거의 10년도 더 된 과거에 딱 한번 보았을 뿐인데. 내가 정말로 좋다고 하는게 맞을까? 이제는 달라져야 하는게 아닐까?

그래서 본 것이다. 디즈니 플러스에 있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좋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영화의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그것이 세월이 지나 나에게 더욱 더 명료하고 친숙하고 감동적이면서 재밌게 다가왔다. 모든 장면과 메타포가 풍부하게 전달이 됐다. 

나는 여전히 미스 리틀 선샤인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건 무척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 감동이 연결되어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행복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게 예술을 통한 감동인걸까. 



2.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을 또 샀다. 

책을 받고 나서 알았다. 아, 이 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책장에서 가서 조금 둘러보다가 금세 찾았다. 이정도로 금세 찾을 거라면 사는 순간에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르트르의 책인데, 실존주의에 대한 관심이 한창 많았던 시절에 구입했던 게 기억났다. 당시에 왜 관심이 많았냐면, 졸업 논문을 써야했기 때문이었다. 방통대로 4년제 학사를 따던 시절, 나는 실존주의를 주제로 리포트를 썼다. 지금은 그 논문을 찾을 수가 없다. 제목만 어딘가에 남아있는데 그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한심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말이 논문이지, 그저 리포트였고 성실함과 분량이 가장 중요한 채점 요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덕분에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책은 배부르게 읽었다. 여전히 실존주의가 뭐냐고 묻는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 안에 어떤 관념적인 기억들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여전히 나는 실존주의 적인 삶의 태도가 스스로에게 남아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샀다. 무언가를 실천하고 있는 나의 태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결국 나의 '행동'을 알기 위한 탐구로서 실존주의를 알아보려고 했던 거였는데 그게 또 반복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왜 최근 실존주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냐면, 이것도 소설 때문인데,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라는 책 때문이다. 

(쓰다보니 나는 자꾸 '두번하는 것'에 대해서, 혹은 '거듭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삶은 매순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나는 어딘가에 놓여서, 그곳에서 시간을 따라 나아간다. 아니, 나아간다는 말조차도 어찌보면 인간적인 해석이다. 온몸으로 시간을 부딪치며 미래를 박살내고 있는 것에 대한 감각에 가깝다. 그렇다면 삶의 본질은 사실상 주어지거나 가지고 있는게 아니고, 삶을 통해서 구현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는 것을 통해서 되는 삶을 늘 상상한다, 뭔가 되기 위해 목표지점을 찍고, 혹은 뭔가 되기 위한 본질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하는 것을 통해 이룩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아니, 의심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조차, 나는 쓰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결국 나아가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우연과 불확정성의 연속이다. 그 연속점에서 그저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매순간을 인지하고 대응 하는 것 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게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실존적 고민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인간존재에 대해 외면하지 않기 위해 '휴머니즘'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궁금하게 된 것이다. 사실, 다시 한번인지도 몰랐지만.



3. 

그리고, 또 떨어졌다.

모든 감정적 기대에 대한 결말은 사실 이거다. 또 연락이 없었고, 나는 또 써야만 한다. 그럼 나는 왜 써야 하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고민은 깊어진다. 그럼에도 써야한다고, 쓰고 싶다고 믿는다면 나는 실마리를 찾고 방법을 찾아야하겠지. 이렇게 애닲게 고민하는 것조차, 사실 부끄럽고 쑥쓰럽고 어떤 면에선 거짓같기도 하다. 정말일까? 나는 정말로 쓰고 싶을까? 쓰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정체성, 혹은 '작가'라는 허황된 지위에 도달하고 싶은 건 아닐까? 계속되는 고민에도 답은 없다. 연속적인 삶 속에서 고민하고 부딪치고, 미래를 마주하며 부서지는게 인간일테니까.

독서를 통해 나를 보고, 답을 구한다. 주말에 읽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최은영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하구나, 여전히 부족하고 아직도 모자라고 아직도 미숙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과거의 나와 연결된 지점을 발견하면 또 흐뭇하고 행복하고 반갑고 기쁘다. 그런 나를 잊지 않으면서 새로워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행동한다. 나는 또 써야할 것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 쓰는 순간, 손가락이 움직이기도 전부터 글은 머릿속에서, 혹은 가슴 속에서 완성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꺼내고 있을 뿐이다. 끝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끝이 없어도 끊임없이. 언젠가는 '또'라는 말에, 예상치 못하는 것이 붙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주절 주절 쓰다보니, 너무 거창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아서 제목이 다시 한번 쑥쓰럽지만 그래도 남겨둔다. 그 마음은 여전히 지금과 연결되어있다고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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