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커피 : 독립 마케팅 스튜디오의 넋두리 다이어리 7
“메일로 피드백 정리해서 보내드렸는데 한번 확인 부탁드려요.”
이런 말이 온갖 채널로 온다. 카톡, 웍스, 슬랙 등. 일하는 파트너에 따라서 플랫폼도 다르고 사람도 분위기도 내용도 다 다르다. 하지만 딱 하나 같은 게 있다. 모두 너무너무 급하다는 것.
이메일 제목만 봐도 대충 느껴진다. 아무런 맥락없이 메일만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전에 공유했던 내용, 주고 받았던 계획, 제안했던 기획안, 현장의 분위기, 미팅 때 이야기 등등. 그런걸 토대로 명확한 업무 내용들과 필요한 것들이 정리되어 메일로 온다. 보통 내가 해야할 일은 그것을 수정하거나 적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진행시키기 위해서 담당자들에게 일을 뿌리는 일이다. 납득하고 설득시키는 일. 나도 수용하지 못한 일을 타인이 수용할 수 있게 밀어넣어야 한다. 머리로도 이해못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디 못한 일을 남에게 하게 하려면 결국 읍소하는 수 밖에 없다. 죄송해요, 저도 어려운 거 아는데, 한번만 해주시면 안될까요?
주말에 이상하게 여유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일이 산더미처럼 있었는데 외면했다. 영상 트리트먼트를 업데이트할 일이 하나 있었고, 카피도 써야 했고, 제안서 작성도 마무리해야했으며 디자인 작업 수정할 것도 있었다.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다. 제안에 들어갈 CM송 아이디어 버전도 하나 컨펌했고, 작업자의 방향 체크, 감독과의 소통 업무도 있었다. 다 각기 다른 브랜드의 일이기도 하고, 같아도 다른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산책도 하고 영화도 봤다. (퓨리오사를 봤는데,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게 있었다.) 그러다 결국 빈둥빈둥 보낸 시간 때문에 원래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 채 월요일을 맞았다. 진짜 진짜 필요한 일은 일요일 밤 12시에 시작해서 월요일 새벽 3시에 끝냈다. 원래 머릿속으로는 더 해야했지만, 그냥 어떻게든 해보자, 라는 마음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그럼 일요일 밤 12시까지 뭐했냐? 3시간 동안 누워서 숏츠를 봤다. 정말 시간 잘 가더라. 뇌는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좋아할까?
그렇게 월요일을 맞이했다. 지금 회상하면 정말 정신을 쏙 빼놓는 월요일이었다. 맡고 있는 브랜드에서 신제품 포토촬영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이 터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 하루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월요일에 하려고 했던 일이 모두 새롭게 갱신됐다. 다 뒤집어 졌다는 얘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일요일에 안해서 차라리 다행인 상황이 된 것이다.
한 브랜드는 이번주 초에 제안을 해달라고 했는데, 일정이 급해서 내부에서 정리하기로 했다고 디테일한 것 체크와 문의만 했다. 그리고 보고 후에 정리된 안으로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마터면 주말에 빡빡하게 제안서 작업을 할 뻔했다.
한 브랜드는 수요일까지 달라고 했던 수정 내용이 있었는데, 거기에 덧붙인 피드백을 월요일에 전달해주었고 일정을 당겨달라고 했다. 일요일에 작업했어도 결국 또 작업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수정은 한번에 하는 게 제일 좋다.)
조금씩 디테일은 다르지만 다른 것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촬영장에서 계속해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조정 불가한 상황, 어쩔 수 없이 맞춰야 하는 일정, 안되더라도 방법을 찾아야하는 문제. 끊임없이 상황은 업데이트되지만 나의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멍하니 촬영장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뭐가 문제일까.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사진을 보며 뇌를 움직인다. 뇌가 움직이나? 아니, 시냅스의 전기신호가 좀 더 활발하게 반짝거리며 오고가려나.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숏츠를 볼 때나, 생산적인 일을 할 때나, 뇌는 그저 멍청하게 뇌의 일을 할 뿐이다.
일단 움직이고 뭐라도 해야 굴러간다.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럴 때 필요한 팁은 두가지가 있다. 가장 작은 일부터 하기, 가장 싫은 일부터 하기. 나의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게 만들 메일을 열어보는 일은 그 두가지 모두 속하는 일이다. 싫은 메일일수록, 처음 읽을 때 충격도 가장 크다. 그 후로는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할 마음이 있으면 영원히 싫고 할 마음으로 보이면 또 괜찮아 보이고 그렇다. 진짜 하기 싫을 때, 그 일이 더 커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실 모든게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매일매일 그런 마음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 있다. 싫다가도 좋았다가 좋다가도 싫었다. (하지만 늘 피곤하다.) 대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내며 얼만큼 억척스러워져야 하는 걸까.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생존’이나 ‘복수’와 같이 명확한 감정에 꽂혔을 때, 다른 것들을 다 내쳐버리고 명확히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성장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개인적으로 ‘마션’의 주인공을 좋아한다. 묵묵하게 자기 할일을 하지만, 그 성취가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인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게 까지 애쓰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애쓰는 것에 대의는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애쓰는 것에조차 애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노력의 디폴트가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도.
사실 이렇게 이런 글을 적는 이유도,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담당자의 메일과 카톡을 읽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 답장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 일단은 가장 읽기 싫은 메일을 가장 먼저 열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