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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Jun 17. 2024

끌고 가는게 아니라 끌려가기

산책과 커피 : 독립 마케팅 스튜디오의 넋두리 다이어리 8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일과 위 아래로 흔들리는 파도에 휩쓸리는 사이에 깨닫게 된 일이 있다. 이미 모든 일을 내가 정면으로 또 전면으로 받게된 이상,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을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는 것. 열심히 일을 쳐낸다고 평화로운 일상을 만들 순 없고 오히려 평화는 남들이 내가 일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즉, 일을 다 끝내고 넘긴 뒤에는 또 알 수 없는 피드백과 의견, 수정들이 몰려오는 걸 맞이해야 하기에 오히려 데드라인까지 시간을 남긴 과정 중에 찾아오는 순간의 평화를 누려야만 한다. 이른바, 전장의 긴박함 속에서 생겨나는 로맨스와 같은 평화랄까.


알고있던 많은 것들이 차례차례 박살난다. 그러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된다. 삶이 마치 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혹은 이제는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혼쭐이라도 내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깨지고 또 뭔가 일어나고 있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고나면 결국 다 웃으며 얘기할만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최근에 몇 번의 촬영을 진행했다. 글로벌 브랜드의 신제품 촬영과 브랜드 필름 촬영이었는데, 글로벌 브랜드 특유의 꼼꼼한 가이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시간과 부담에 쫓겨야만 했다. 벗어나고 싶고 지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그 ‘어쩔 수 없음’에서 느껴지는 모든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전부 이해 된다. 그래서 사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로를 달래느라 애를 쓴다. 가끔 그런 모습의 나 자신을 약간 객관화해서 바라보면 조금 우습거나 낯부끄러울 때가 있다. 현장에서 CD(Creative Director)라는 역할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그냥 황희 정승처럼, 음 좋네요, 훌륭합니다,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저렇게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라고 하거나 가끔 말없이 농담을 던지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는게 굳이 필요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영상에서 촬영장은 감독의 무대와 같다고 생각하고, 사진 촬영은 포토그래퍼가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광고 업계에서 CD의 역할은 마치 영화 제작자처럼 방향을 잡고 판을 깔아주는 역할이고, 광고주와 제작물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현장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믿기에 되도록 말을 줄이려고 한다. 현장에 진입하기 전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야기나눈다면, 현장에선 사실 크게 할 말이 없어야 맞다. 하지만 그게 일을 덜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뭐 별 수 없는 거고.


결국 결과물로, 그 과정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믿음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내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지나간 뒤에 판단될 수 밖에 없다. 모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관철시킬 수 밖에 없고, 모두가 그렇게 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경력 위에서 뛰놀고 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 네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어차피 삶은 전쟁과 같은데, 매번 새로운 싸움을 벌이면서 견뎌내긴 힘들다.


예전에는 스스로 앞장서서 모두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었다. 카리스마! 부럽고 또 배우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그렇게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들이 멋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몇 번 그렇게 하려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고 싶거나, 내 몸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모두를 끌고 가는 리더의 스타일은 아니다. 팀을 이끄는 역할이었던 적도 있고, 본의 아니게 어떤 구성원들의 리더가 된 적도 있긴 하지만, 구성원들의 멱살을 잡아서 어떻게든 목적지까지 가게 만드는 리더의 모습은 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그런 걸 싫어하기도 하지만, 노력해봐도 잘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느끼기에 나는 좀 더 함께 일 하는 사람들을 받쳐주고 지지해주는 역할이 마음이 편하다. 수용력이 좋은 태도로 모두의 고민을 받아주며 스스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좋다. 일이란 건, 뾰족하게 다듬기보다는 우선은 모두가 맡은 역할을 빨리빨리 넘기면서 돌아가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서 계속해서 북돋아주는 의미로 다독여주며 멤버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며 일을 진행시킨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지만, 맞는 건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요새는 조금씩 깨지고 있다. 받쳐주는 리더십이 틀렸다거나 나의 스타일이 틀렸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또 다른 변화의 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누군가를 끌고가는게 아니라, 받쳐주며 간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조금 일하는게 편하고 함께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내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고, 상대가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함께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결과물의 퀄리티보다는 합과 협, 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계속 이러다간 어떤 한계에 부딪치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때로는 이런 관계를 확장하고 결과물을 위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다보면 또 넓어지는 세계가 있을텐데, 나는 그걸 좀 닫아놓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하기 쉬운 사람들을 찾는 나 자신을 발견했단 뜻이다. 받쳐주는 역할을 하다가, 받쳐주기 쉬운 사람을 찾는 관성이 생겨버리고 만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나는 그래도 지난 시절보다 조금 더 뭔가를 시도하고 만들 수 있는 역량이나 기회들을 마주하고 있다. 알만한 브랜드의 일들을 하고 있고, 거기서 일을 만들어서 누군가와 협업할 수 있는 예산과 프로젝트들이 있다. 이 기회를 내가 가진 네트워크와 경험을 더 확장하고 결과물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게 활용한다면? 프로젝트에 잘 어울리는 사람, 내가 보기에 멋있는 사람, 잘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을 만들어간다면? 내가 정말로 누군가를 지지해주고 받쳐주는 걸 잘한다면, 그럼 정말 나는 잘하는 사람들을 잘 품고 그들이 잘하는 동안 끌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끌고 가는 건 어렵다는 생각만 했지, 끌려가고 싶단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별거 아닌데 참, 여기까지 오는데도 오래 걸렸다.


최근에 워크숍 3회차를 진행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내가 가장 많이하는 일, 내가 직접 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동안 했던 것 중에 잘 정리가 된 기획안이나 제안서 몇 개를 참여한 분들에게 보여드렸다. (대외비 자료인 점은 지켜달라고 꼭꼭 당부했다.) 간략하게 제안 미팅을 하듯 맥락을 설명드리기도 하고, 쭉 이야기를 풀었다. 광고나 마케팅 프로젝트들의 결과물은 매체를 타거나 공개가 되니까 대중들에게 익숙할 수 있어도 초기 제안에 집약되어있는 맥락이나 논리들은 관계자들이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에 생소하고 낯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반응은 의외였다. 너무 재밌어하고,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배울 게 많았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나에겐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과정이라 어떤 것에 내가 가장 공들이고 있었는지 몰랐던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못하는 것을 매꾸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는 잘 알지만, 뭘 잘하는 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 잘하는 건 너무 자연스럽게 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인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덕규는 채치수를 보며 무가 되라고 말했다. 서태웅이라는 천재는 패스를 배우며 진정한 에이스가 되었다. 성장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하며, 그 과정에 지난 경험을 담보로 한 고통은 필수 요소다. 욕심을 버리는 일이, 어쩌면 진짜 욕심을 마주하며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욕심을 버린다고 말하지만, 버려지는 욕심은 하나도 없다. 그저 욕심의 방향을 바꾸고, 좀 더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눈을 넓히는 것 뿐이다. 매순간 나를 마주하다보면 내가 가야할 길과 나의 욕망이 좀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다. 그게 맞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는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발걸음이 내가 원하는 느낌에 가깝다는 감각 정도는 있다. 일단은 그걸 믿고 가보는 것이고, 그게 틀리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을 위한 질문

Q. 혹시 나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는데, 남들이 보기에 '너 이거 잘하는데' 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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