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다이어리 29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 상상도 하기 싫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망쳐버리면 어떻게 될까?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스스로 다 망쳐버린다면? 그럼 내 인생도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고 말까?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 그렇게 되면 나는 달라질까? 다른 사람이 될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문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최근 촬영장에서 누가 말했다. 확실히 CD님은 N같아요. N 맞죠? 그래서 맞다고 하면서 S는 어떤데요? 라고 했더니 그런 얘기를 했다. 자면서 이런 저런 공상 같은 거 해본 적 있지 않냐고. 나는 매일 밤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N이라면서.
일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상상력을 쓸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 가는 방향이 언제나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관으로 젖어들어 우울한 마음을 간직한 채 애써 희망을 품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건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함에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이 없다면 이 많은 압박과 긴 시간을 견뎌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일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능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어서 소비하고 소중한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데 기여하고, 가치를 올리고 사회 안에서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맞다고 믿었다. 물론 지금도 그 믿음에 변함은 없다. 다만 가끔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 아니라고 해도 별 수는 없다. 그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 공상을 흔하게 한다. 내가 만약 재벌집 아들로 태어났다면?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초능력이 있다면? 일확천금이 떨어진다면? 갑자기 팔이 하나 더 돋아난다면? 상상은 꼭 즐겁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냥 하는 것이 더 많다. 문득문득 부지기수로 떠오르고 내 삶에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하는 것이다. 왼발 다음에 오른발을 내딛어야 걷게 되는 것처럼, 내 삶은 상상으로 펼쳐진 일상을 헤치며 현실로 나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니까.
광고를 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것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설득력 있는 예상을 하느냐, 를 기준으로 가름되곤 한다. 어떤 면에선 꽤나 정치적이다. 무리를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사람을 움직이는 일이다. 무슨 말이냐면, 대중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광고주의 니즈를 파악하고 설득해서 돈을 쓰게 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제작물을 만들고 그걸 세상에 내보낸 뒤 목적한 바를 이루는 지 계속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수레바퀴처럼 계속 굴러간다. 바퀴가 구르는 행위는 늘 같지만, 바퀴가 지나가는 길은 매번 다른 법이다.
다 망쳐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위험하거나, 혹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불안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반대로 작용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하고, 잘 하려고 한다. 망치면 절대 안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망쳐도 되니까 한번 더 해보는 것이다. 잘해보려고 시간과 몸과 마음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굴러가다보면 어느 순간 뭔가 망가질 수도 있겠지, 길을 벗어날 수도 있을테고 때론 멈춰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근데 어쩔 수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세상이니까.
망쳐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망치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