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2차 가셔야죠." B가 말했다. "요 앞에 포장마차라도 갈까요?"
"안돼, 나 집에 가야돼." F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에이, 형님이 무슨 집에 가신다고." B 옆에 있던 C가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니야, 진짜야." F가 멎쩍은 듯이 말했다. "집에 가서 분리수거 해야 돼."
"분리수거요?" B가 짐짓 놀란 듯이 대답했다. "오, 형님 요새 집에서 분리수거도 하세요?"
"그래, 임마." F가 소주잔 바닥에 얇게 깔린 소주를 마저 마시고 말했다. "애엄마가 말이야. 어디서 봤는지 이제는 명확하게 요구를 하더라고. 그게 텔레비전에 나왔었다며?" C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래, 그거. 그래서 이제는 바로 말해, 여보, 오늘 분리수거 하는 날이니까 분리수거 좀 꼭 해줘, 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냥 내 의견을 묻거나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휙 가서 자기 일을 해버려. 처음에는 난 그냥 멍하니 있었거든? 근데 하게 돼. 진짜로 하게 돼. 홀린듯이 시간이 가까워지면 막 안달나다가 하게 돼. 근데 웃긴 건, 그렇게 한 번 말하고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해. 잊지 말고 하라는 말도 안하고, 시간이 늦어져도 언제 할거냐고 재촉하지도 않아. 그냥 자기는 자기 일 하고 나는 내 일을 해야한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경을 안쓰는 것처럼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분리수거를 하게 되지. 그렇게 몇 번 하다보니까. 계속 하게 되더라고. 하다보니까 습관이 되버려."
"근데 맞아." B가 대답했다. "사실 근데 나도 그래. 어느 날 애 엄마가, 여보 토요일에 애들 학원 6시에 끝나니까 그 때 데려와서 밥 좀 먹여줘, 냉장고에 음식있는거 그냥 데워서 먹으면 돼, 나는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게. 라고 말하고 휙 자기 일을 하는 거야. 처음에는 뭐야 왜 그걸 나한테 그래? 라고 했는데 그렇게만 말하니까 어어어 그래그래 하고 넘어가잖아? 그런 다음에는 그냥 하게 된다. 마법같아."
"에이 진짜?" C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이 자식아." F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더라니까. 예전에는 안그랬거든. 예전에는 나한테, 당신은 왜 설거지도 안해? 당신은 집에 관심이 있어? 당신이 애들 아빠로서 한 게 뭐 있어? 막 이렇게 얘기하고 나는 거기에, 내가 돈 벌었잖아! 나는 일하잖아! 나도 바뻐! 라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싸우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 그냥 뭐 해줘, 응 알았어, 라고 하고 집에 가서 할 일 하게 되더라고. 또 웃긴 게, 내가 집에 가서 할 일이 생기니까 집에 있는게 편해. 죄책감이 안든다고나 할까? 신기하게 가정에 애정이 생긴다니까. 너도 알잖아. 우리 쪽 애들 바빠서 잘 집에 들어가지도 않잖아. 이제 20년 넘었는데, 이쯤되면 집에 있는게 어색하단말야. 그런데 아내가 그렇게 말해줘서 집에서 빨래도 하고 분리수거도 하고 하니까 집에 있는 마음이 되게 편하고 좋아. 오히려 고맙기도 하더라고."
"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B가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아니, 애들 기르면서 도와준게 뭐가 있냐고 하면서 싸우고... 나도 와이프가 힘들고 서러워서 그런 거 알지, 근데 또 그런 식으로 나쁜 사람 만들면 나도 할 말이 있잖아. 나도 놀았던건 아니잖아.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한 건데, 그걸 그렇게 얘기하니까 속이 상했다고. 근데 이젠 그런 게 없이 그냥 내 할 일이 생기고, 나보고 하라고 하고 그러니까 또 어떤 면에선 마음이 편해. 예전처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보 다음 주에 애들 좀 봐줘, 응 알았어 이런 식이야. 근데 만약 내가 안되면, 여보 다음 주에 애들 좀 봐줘, 아 미안해 나 다음 주에 시간이 안돼, 그럼 언제 돼?, 그 다음 주는 괜찮을 것 같아 라는 식으로 바뀐거야. 예전에는 안된다고 하면 으이그 또 안된대 또 안돼 회사로 이사를 가지 이러면서 뭐라고 하고 나는 무슨 말을 그런식으로 하냐고 내가 가서 놀다가 오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그랬었는데 이젠 달라졌지."
"신기하네" C가 말했다.
"그치?" F가 말했다. "어른의 세계란 그런 것이야."
"여튼 2차는 아무도 안간다는 거죠?" C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아니." F가 대답했다. "딱, 한 잔만 하고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