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 A씨

by 리쌩전


"우리 같이 강원도에 놀러간 적 있잖아." B가 A에게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냥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절에 들어갔잖아. 절까지 이어진 숲 길을 천천히 아무 말도 안하고 걸었지. 그러다 우연히 길 가에 있는 나무에 걸린 팻말이 있었어. 거기에 나무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그 이름이 되게 웃겼던 기억이 나. 그 이름 기억나?"

A는 조용히 커피 잔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안에는 작은 얼음이 몇 개 떠다녔다. 크레마라고 했던가. 커피에서 생긴 갈색의 거품이 몇 몇 얼음에 묻어있었다. 커피 잔을 둥글게 돌려보니 달그락 하고 얼음이 유리로 된 커피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위스키라도 마시는 것 같네, 라고 생각하며 A는 살짝 웃었다.

"내 얘기 듣고 있어?" B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억나냐고."

"아니." A는 나지막히 대답했다. "모르겠어."

"오빠는 늘 이런 식이야." B는 의자 깊숙히 몸을 기대며 말했다.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의지가 없는 건지. 처음에는 져주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처음부터 그랬어."

"그랬구나." A는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가끔 우리 예전을 생각하면 아련한 느낌이 들기도 해. 이만큼 친밀했던 사람이 또 있었나 싶은 마음이 드는거야. 내 마음을 되게 잘 알아주는 것 같았고, 또 나도 오빠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슬플 때도 그렇고 화날 때도 그랬어. 오빠는 관심도 없는 패션에 신경을 쓰기도 하고, 나는 듣지도 않았던 영국 밴드 음악을 듣기 시작했지. 그 때가 제일 많이 변했던 시절인 것 같아. 그리고 제일 빛났던 것 같기도 해. 이것봐, 나 그 때 우리 한강 가서 놀다가 넘어져서 생긴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어."

B는 루즈한 핏의 검은 니트를 걷어서 하얗고 얇은 팔을 드러냈다. 팔꿈치 위로 반달처럼 하얀 흉터가 보였다.

"아팠겠네." A는 흉터를 보며 말했다.

"아니." B는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아픈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응." A가 들릴듯 말듯 조용히 말했다. "나 가야겠어."

"어디가?" B가 물었다.

"집에 가야지." A가 빈 의자에 걸어 둔 가방을 들며 일어났다. A는 입술만 살짝 웃어보이며 B에게 손인사를 했다. "오늘 집에 가서 아내랑 같이 밥 먹기로 했어. 그리고 아까 말했던 카드말인데, 나는 또 새 카드를 만들 여유는 없을 것 같아. 미안해. 내일 내가 회사에 가서 신입사원들이나 팀원들한테 혹시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고 말해줄게. 커피 잘 마셨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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