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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Oct 17. 2016

내 발을 밟지 마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지하철에서 발을 밟혔다 밟은 사람은 자신이 밟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가만히 서있었다 발을 내려다봤다 낯선 사람에게 대뜸 말을 걸기가 어색해서 알아서 빼주길 바랐다 하지만 상대는 꿈쩍도 않았다 어떻게 말을 하지 고민 됐다 문제는 명확했다 발을 밟혔고 누가 밟았는지 알고 밟혀서 아프고 괴롭다 그럼 무슨 말을 꺼낼까 저기요 제 밟을 밟으셨어요, 혹은 발 좀 빼주세요, 아니면 아! 하고 소리를 질러볼까 신경도 안쓰면 어떡하지 아니 어떻게 사람 발을 밟고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라고 화를 내볼까 도움을 청할까 저기요 이 사람이 제 발을 밟고 있네요 아니면 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려볼까 지하철 민폐인간 지하철 지신밟기 그러면 꼭 빼달라고 말을 하면 되지 SNS에 올리실 건 뭔가요 가해자 인권은 인권도 아닌가요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두렵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이 사람은 계속 발을 밟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힐끗 쳐다본 것 같은데도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무 답답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저번에 지하철에서 발을 밟혔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전화기를 꺼내서 친구 이름을 찾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친구가 대답했다 나 지하철인데 지금 어떤 사람이 내 발을 밟고 있어 아 정말? 친구가 대답해줬다 아 근데 뭔가 피해달라고 말하기 뭐하지? 어 맞아 맞아 나는 공감해준 마음이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도 그냥 자연스럽게 갈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 말을 잘 못하겠더라 그래 맞아 나도 그래 내가 지금 그래 친구는 내 마음을 이해해줬고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반가웠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려웠던 마음도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볼일이 있다고 전화를 끊었다 상대는 아직도 내 발을 밟고 있었다 나는 마음도 조금 풀어지고 용기도 생겨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봤다 상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눈빛이 닿는 순간 피하듯 고개를 돌렸고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열차를 내려버렸다 나는 발목에 뻐근한 불편함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아까 통화했던 친구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내 떠오른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의자 깊숙히 몸을 심었다 아직 집까지 갈 길이 멀다 눈을 감고 열차에 실린 몸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발목이 여전히 불편하다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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