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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Mar 27. 2017

촬영 전 날의 일기



내일은 촬영날이다. 촬영 전에는 사실 바쁘고 싶지 않다. 촬영 가서 딱히 할 일도 없다. 에이전시의 일은 광고주와 촬영 스태프 사이에서 꼰대질과 의기양양, 참견과 양보, 눈치와 감시 등등을 하는 일이다. 간식은 그득하게 쌓여있고 촬영장 한켠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길고 긴 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촬영 전에는 '아 내일 촬영이네' 라는 핑계로 모든 약속과 계획을 내팽개쳐두고 걱정이 앞선 잠을 청해야한다. 그게 온전히 촬영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일정이 빼곡하다. 많은 일들이 나에게 그런 하루를 허락하지 않는다. 새벽까지 떠나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 전까지 정리해야하는 문서 투성이다. 써야하는 카피가 쌓여있고, 수정해야하는 제안서가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이런 날엔 왜이리 평소에 하지도 않던 게임이 재밌는지. 인생의 걸림돌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게 가장 위험하다. 수능 전에도 그랬다. 재수를 했을 때였던 것 같다. 절대로 수능이 끝나기 전에는 피시방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수능 일주일? 아니 한달 정도 전이었던 것 같다. 이미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게임을 보고 집에서 한 번 깔았다가 시작하자마자 하루를 꼴딱 샜던게 기억난다. 그게 와우였지. 뭐든 금기된 순간에 가장 재밌어지는 것 같다. 브레이크가 걸리는 순간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관성이 내 몸을 묵직하게 밀어내는 것과 비슷한 걸까. 잘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놓고 싶다는 생각도 그렇다. 그런 생각들이야 틈틈이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일은 많지 않다. 지금 이 블로그의 글을 쓴 시기들을 비교해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날일 수록 괜히 블로그를 들어와보게 만드는 마음이 있다. 괜히 고개를 드는, 음흉한 마음. 그렇게 나는 숙제를 미루듯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낸다.

오늘 미팅 때 함께 갔던 대리와 떠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너무 바쁘다고, 일을 없애는데 급급해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나누고 난 다음이었다. 잘 모르겠다. 나는 떠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돌아오는 것을 배제한 출발을 해본 적은 없다. 늘 내 인생의 어딘가는 중심이 박힌 원심력을 느끼며 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 자주했다. 정체는 모른다. 알아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가 때가 되면 알게될 것 같다.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 이렇게 돌다 보면, 강해지는 원심력과 빨라지는 가속도에 원의 바깥으로 날아가게 되버릴지도 모르지.

문장이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는 타입이 아니다. 최근에 쓰는 글의 대부분은 일과 관련된 글이다. 그러다보니 자주 다시 읽어본다. 곱씹기도 하고 수정도 많이한다. 그러다 느끼는 건, 나는 보통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도 정리되지 않는다. 문장 하나 담백하게 내뱉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을까. 자괴감이 든다. 

최근에 바빠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 손님이 왔다. 왜 밥 먹으러 안갔냐고 일이 많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손님에게, 맞받아친답시고 네 일이 너무 많은데 제가 먹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안갔어요, 라고 말하고 같이 웃었다. 근데 뭔가 시원했다. 그렇게 말한 문장이 온전히 내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나. (나약하면 안되나?)

여튼, 내일은 촬영이다. 오늘도 한시간 남았다. 여섯시 정도에 일어나야하고, 일곱시까지 회사에 가야한다. 오늘은 비가 왔으니 내일은 조금 맑은 하늘일까. 걱정보단 기대가 앞선다. 문득, 옆에 쌓인 일들을 하지 말고 그냥 내일 가서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곧 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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