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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May 19. 2017

기분 좋은 비판



현대시평론 수업을 들은 적 있다. 학교 다닐 때 일이었다. 문창과 전용 수업이라 타과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소홀함 없이 열심히 들었다. 나중에 학기가 끝나고 B+를 받았는데, 교수님이 타과학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양해를 구했고 나는 수업이 즐거워서 좋았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시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가진 나에게 기본적으로 시를 바라보는 태도를 길러준, 좋은 수업이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시평론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나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진 않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신 맥락은 이랬다. 문학평론가가 시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은 영화 비평과는 다르다. 절대 부정적인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시와 시집에 대한 좋은 점과 해석만 쓴다고.


이상하게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남았다. 사실 그 때까진 평론이나 칼럼이라고 하면 뭔가 신랄한 비판이 있어야 날 선 이야기가 되는게 아닌가 싶었다. 시의 세상에서는 그런 게 없구나, 모든 것이 역할을 가지고 서로의 작품을 존중해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싫으면 안쓰면 그만이지, 굳이 나쁘다고 말할 필요 없는 거구나. 그렇게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며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자기 검열이 생겨 예술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라는 고민도 했던 것 같다.


신기한 건 그 다음이다. 나중에 비슷한 접근방식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 것. 무려 세 번이나. 


첫 째는, 김호 대표님의 워크숍이었다. 워크숍 자체도 재밌었지만, 워크숍을 열면서,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기위해 타인에 의견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절대로 NO, BUT 이라고 말하지 않고 YES, AND라고 이야기하자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실제로 더 시간이 지나 야마자키 료씨와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워크숍 자리에서는 절대로 NO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 모든 것을 수용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둘 째는, 지금도 열심히 번역하고 있는 일본의 웹진 <그린즈>. 그린즈를 보면 일본 전국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비판과 평가가 없다. 그들은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들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린즈>는 늘 상대가 뭘 잘하고 있고 이것이 왜 지금 시대에, 이곳에서 의미를 가지는 지 말한다. 실제로는 조금 부족하고, 보이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좋은 점들만을 모아서 보여준다. 하지만 비판이 없다고 해서 재미가 없거나 날이서지 않아서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린즈>의 컨텐츠는 충분히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프로젝트, 공간,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와 이런 것들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것을 전달하고, 동시에 당사자들에게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


셋 째는 최근이다. SNS에서 노희경 작가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다. 수업에서 서로 작품을 써서 합평을 할 때, 노희경 작가가 제시한 룰은 이랬다. 타인의 작품을 비판하지 않고 좋은 점 두 가지와 궁금한 점 한가지를 이야기할 것. 학교 다닐 때 문창과 동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합평은 정말 괴로운 시간이라고 한다. 타인의 작품을 비난하는 건, 자신의 작품이 비난 당할 가능성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감정적이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하지만 좋은 점을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 그게 왜 좋은지에 대해 설명해야하고 작품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상대에게도 긍정적인 발전 가능성이 된다. 또한 비판의 지점을 '궁금한 점'이라는 타이틀로 공격적이지 않게 제공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비판 없는 피드백이라는 건 어찌보면 칼을 쥐지 않은 군인처럼 중요한 기능이 부족한 컨텐츠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무분별한 비판과 의미 없는 비난들이 팽배하다. '취향'이라는 방패에 몸을 가리고, '취존'이라는 성 안에서 상대에 대한 애정 없는 화살을 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상대는 화살을 맞는 것을 고마운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비판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 없는 곳에 비판을 하는 것이 비판이 필요한 순간의 중요성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불필요하다. 


서울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 바로 가까이,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서울로가 있다. 물론 실망스러운 부분 있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만큼 만족하는 지점도 있다. 가까운 곳에 공원이 생긴 것, 자동차가 다니던 길이 산책로가 된 것, 자동차 도로 위를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서울 정중앙에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상징성 등. 사실 그런 이야기도 같이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취향은 좋아하기 위해 있는 거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깎아내리기 위해 있는 건 아니다.


문화, 예술, 정치나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사회적기업, 협동조합들도 마찬가지. 열심히, 심지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뛰어들어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이전에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무척 좋다' 라는 말을 먼저 건네보는 건 어떨까. 


마지막으로, 야마자키 료씨와 전주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청년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료씨가 물었다. 왜 이렇게 다들 힘들어 하냐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들어와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즐겁고 기쁘지 않으면 잘 되기 어려울텐데... 라면서. 


맞다.

결국,

기왕 잘 되라고 하는 소리라면, 일단 서로 기분 좋게 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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