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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May 15. 2017

재활용 불가


0.

가끔 과거를 되짚어 보며 곳곳에 숨은 내 잘못을 헤아려본다.


1.

부끄럽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이렇게 분명히 잘못한 걸로 보이는데, 왜 난 그랬을까, 왜 난, 그 때 그랬을까. 열심히 달리고 있는 버스 창가에 순간적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것처럼, 한 순간 마음 속에 어둠이 깊이 깔린다. 이내 걷혀진다.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찾아온다. 진득하게 앞을 마주한다. 그랬던 나도, 지금의 나도, 나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 


2.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3.

달그락 달그락, 손에 쥐고 있는 플라스틱으로 된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본다. 차가운 음료를 시키면 투명 잔에 담아준다. 뭐든지 마시는 건 단숨에 마셔버리기 때문에, 오래 먹기 위해선 오히려 뜨거운 것이 좋다. 하지만 몸에 열이 많은 탓인지, 조금만 날씨가 따뜻해지면 버릇처럼 아이스 음료를 시키고 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커피를 시켜서 단숨에 마시고 얼음만 남아있는 잔을 줄곧 들고 다녔다.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쓰레기통이 없었을 뿐이었다. 남아있는 얼음이 조금 녹으면 그 물을 또 조금 마신다. 빨대를 잘근잘근 씹기도 한다. 미묘한 고소한 맛이 난다. 들고 있는 동안 시선의 한켠은 늘 쓰레기통을 찾는다.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버려버릴 기세로.


4.

그녀와 있을 때는 늘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새로운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건 매우 자극적인 일이었다. 매순간 더 새로운일, 더 즐거운일을 바랐고 나중에는 즐겁지 않아도 괜찮았다. 더 파격적이고 더 스릴있는 일들을 찾아해멨다. 시간이 흘러 좀 더 진정하길 바란다고 느꼈을 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 차갑게 더 무겁게 나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저만치, 그녀가 보이지도 않을만큼 (아니, 오히려 그녀 입장에서 내가 보이지 않았으리라) 멀어졌을 때 말했다. 우리는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황당했을 거라 생각한다. 함께라고 생각하고, 내가 조금 늦게 오는 거라 생각하고 앞서 나갔는데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으니. 그녀는 사과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잘못했다는게 아니야, 더 잘하자는 거지. 거짓말이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렇게 멀어졌는데도 함께라는게 싫었을 뿐이었다. 허둥지둥, 헤매는 그녀의 마음을 빌미로 우린 헤어졌다. 


5.

그래도 계속 하는 거야, 친구는 말했다. 잘못하는 건 앞으로도 계속 있을거라고. 사고 한 번 안내 본 운전자가 어딨냐. 사고를 안내려고 하는 게 웃긴거야. 사고를 내더라도 잘 수습하고 다음부터 안하려고 하면 돼. 그리고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지. 사고가 날 때마다 패닉에 쳐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사고 수습도 못하고 당황하면 그게 더 민폐야. 그냥 계속 하는 거야. 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하고, 사고가 나더라도 큰 사고가 아니길 빌고, 네 책임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야. 

친구의 대답이었다. 내 질문은, 운전하고 사고 내본 적 있어? 사고 나면 어떡하지, 였다.


6.

보통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표현할 때, 그건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사람인지라기보다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가 나아갈 방향성에 더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야, 나는 이래, 나는 저래, 라고 말하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보통, 믿을 필요도 없고.


7.

예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수두룩하게 날아가듯 글을 써내려갔을까.


8.

그때의 난 어땠을까. 지금의 나는 약간 미래지향적이다.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 내가 바라보는 과거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재밌는 건 그것도 계속 변해간다는 것이다. 시선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서 가만히 있는 과거의 나는 계속해서 달라진다. 평가가 달라진다. 즐거웠던 순간이 치열했던 순간이 되기도 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과거의 나는 주체였는데, 과거가 되는 순간 객체가 되어버렸다. 주인이 손님이 되어버리고, 감독이 배우가 되고, 계속해서 멀어진다. 시선은 덮이고 레이어는 많아지고 멀어지고 커지고 넓어지고 스크린이 객석이 되고 렌즈는 뷰파인더가 되고...


9.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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