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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상 Jul 12. 2017

가끔 슬픈 꿈을 꾼다



난 가끔 슬프고 때때로 기쁘다. 그리고 종종 즐겁다.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지만, 대부분 아무렇지 않다. 감정적인 고백은 반복되지만 감정은 매번 새롭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감정이란게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 말이다.


꿈을 꿨다. 내 꿈은 특별하지 않다. 늘 일상을 담는다. 하지만 배경과 상황이 현실과 좀 멀어질뿐. 새하얀 홋카이도의 눈 밭을 걸었다. 물이 넘친 화장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이디어가 극찬을 받은 회의가 있었다. 모두가 굳게 다문 입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도시의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모두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침대에 매달려있던 1시간 정도 사이에 꾼 꿈이다. 나는 그 꿈 속에서조차 주인공이 아니었다.


점점 많아지는 일을 견디기 힘들다. 힘들다는 말이 더러 튀어나온다. 그래봤자 막내나, 피디님이나, 다른 회사 대리에게.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이게 뭐가 힘들어, 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튀어나온다. 어제 만난 광고주가 했던 말처럼. 광채로 덮어버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스스로 피어나듯이. 근데 그렇다고 꼭 견뎌야 하는 건 아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난 견딜 수 있다. 그건 내가 안다.


혁규가 월요일 아침 뜬금없이 카톡을 보냈다. 죽지 말라고, 이것 좀 보라고. 토요일에 같이 한 잔 할 때, 내가 너무 많은 푸념을 늘어놓은 탓일까. 지난 주에 했던 그것이 알고싶다를 꼭 보라면서, 힘내라고 죽지말라고 카톡이 왔다. 뭔 개소리인가 싶었고, 여전히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얘기는 개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일하고 있었고, 그 일이 왜 많은지 고민해본적 없으며, 너무 많이 일해서 죽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나약한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강하지 않다.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에 확신이 없어졌다. 나는 내일을 모른다. 내 일도 모르고.


방송 안에서 인터뷰를 한 한 일본인은 말했다. 일본도 30년 전에는 자살을 개인의 일로 취급했다고. 하지만 버블 붕괴 이후 그건 회사의 책임이며,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근데 왜 우리는 수많은 자살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자살에 무뎌지며, 자살한 사람들을 나약한 사람들로 몰아세우고 숨기고 감추고..


왜그랬을까, 그들의 슬픔을 마주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품어주지 못하고.


방송에 나온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10%가 자살을 선택한다고. 나는 그걸 보고 조금 다르게 들렸다. 우울증은 치사율이 10%인 병이라고.


난 여전히 가끔 슬프다. 지금은 슬픈 순간이다. 지금의 슬픔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다스릴 수 없는 슬픔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하는 이유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난 절대 우울증 따위 걸리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나이브한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 사람은 '나는 내일 절대 죽지 않을거야' 라고 장담하는 것과 똑같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죽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을 어떻게 등치로 삼을 수 있을까. 나도 슬픔에 잠식될 수 있다. 기쁨에 잠식될 수도 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 나는, 잠재적인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의 대상으로서의 모두를 품고, 나 혼자만을 위한 하나의 꿈을 꾼다.


내 꿈은 홋카이도에 사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한 겨울에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차오를 정도에 눈이 내리는 추운 지역의 마을에서 조용히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나지막한 시간이 흐르는 곳에서 사는 것이 꿈이다. 그 꿈이, 오늘도 여전히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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