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 필터와 차 깜빡이와 스타트업 블로그의 상관관계
올해초에 집에 있는 드럼식 건조기가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 렌트한 집에 딸려 있는 거라 정말 고장이 났으면 집주인이 해결을 해주긴 하겠지만, 당장 빨래된 옷들을 말려서 입어야 해서 인터넷에서 제조사 Bosch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이 건조기의 매뉴얼을 찾아봤다.
매뉴얼을 찬찬히 보다 보니 린트 (옷의 섬유찌거기나 보풀) 필터가 꽉 차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린트 필터는 한 두번씩 돌릴때마다 청소를 했는데 무슨 소리냐 하며 더 자세히 보니 우리가 청소하는 필터 말고도 다른 필터가 있다. 이건 건조기 본체 아랫쪽을 뜯어서 꺼내어서 청소해야 하는 부분인데, 우리는 이게 거기 붙어 있는지조차 아예 몰랐었으니 당연히 우리가 이 집에 산 1년간 한번도 청소를 한 적이 없지.
부랴부랴 이게 맞을까 의구심을 누르고 본체 앞판을 뜯어내어 그 필터를 살펴보니 정말 이러니 건조기가 파업을 할 만 하구나 싶을 정도로 보풀과 먼지가 가득 차 있다. 쌓여있는 부피로 볼때 이전 세입자도 이 필터의 존재를 모르고 써왔을 것 같다. 최소 3-4년은 쌓인 것 같은 먼지들! 몸서리를 쳐 가면서 그 보풀과 먼지들을 다 끄집어내고 필터를 물로 씻고 나니 언제 그랬냐 싶게 건조기는 다시 생생해졌다. 필터의 존재를 모른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나와 우리 식구들 때문에 자기 할일 잘 하는 건조기를 모함할 뻔 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운전을 잘하는 드라이버는 아니다. 특히 최근에 차선을 바꾸려고 하다가 블라인드 스팟에 있던 차가 빠앙! 하면서 휙 지나가버려서 핸들을 잡고 덜덜 떨며 십년감수할뻔 한 일들이 몇번 있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차를 바꾸었는데 그 사이 차에 들어가는 기술도 너무나 좋아져서 나의 블라인드 스팟에 차가 있다는 사실도 그 차가 속도를 내면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도 백미러 안쪽에 불이 켜지거나 다급하게 깜빡이거나 하면서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너무 필요로 하던 기능이라 엄청 좋아하면서 생각해보니,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특히나 회사를 만들고 비지니스를 하면서 내가 못보고 혹은 봐도 인지를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에 이렇게 꼭 집어서 알려주는 warning이 있었으면 좋겠다. 차의 블라인드 스팟이라는 건 일단 존재를 알면서도 매번 체크하는 걸 잊거나 체크해도 (동태눈깔이라) 못 보거나 해서 다가오는 차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존재조차 모르는 모르는 것들은 어떻게 이런 warning을 미리 받을 수 있을까?
올해 회사일에서 크게 느낀 것은 "I don't know what I don't know"였다. 나는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뭘 모르는지를 알면 이미 답을 찾기 위한 프로세스를 반쯤은 한 것이다. 그런데 뭐를 모르는지도 모른다면?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면?
예를 들면 팀이 커지면서 일거리를 관리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때에 나는 하루하루 너무 바쁜데 매몰되어 있어서 일하는 방식의 조류가 뒤바뀌고 있다는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큰 그림이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너무나 명징한 그것이 안에서는 안 보이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크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이건 앞으로의 나의 모든 일에 위기감을 줄만한 사건이었다. 내가 모른다는 걸 알아내는 기제가 무언가 필요하다는 것. 내가 CPO이든 CEO이든 뭐가 되었든간에 내가 모르는 것들 그렇지만 사실은 알아야 할 것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일단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선별해서 원하는 것을 배우고 알아낼 수 있겠지만,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Phillip G. Armour의 <The Five Orders of Ignorance>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0th Order Ignorance (0OI)는 Lack of Ignorance 즉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
1th Order Ignorance (1OI)는 Lack of Knowledge, 질문은 있으나 답이 없는 상태, 적어도 무엇을 모르는지는 아는 상태.
2nd Order Ignorance (2OI)는 Lack of Awareness, 그러니까 내가 고민하는 모른다는 걸 모르는 상태.
3rd Order Ignorance (3OI)는 Lack of Process, 내가 모른다는 걸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걸 어떻게 발견할지 적절히 효과적인 방법을 모르는 상태.
4th Order Ignorance (4OI)는 Meta Ignorance로 이런 5 order의 무지가 있다는 걸 모르는 무지 (recursive라니 컴퓨터 사이언티스트의 직업 조크인가)라 이건 이제 적어도 해결이 된 셈이다.
이 중에서 내가 요새 주로 고민하는 것은 3OI이다.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 전반에 걸쳐 요긴하게 써먹을, 내가 모르는 걸을 모르는 걸 발견하는 기제를 구축하는가 하는 것. 이것은 생각해보면 (Phillip G. Armour가 본래 페이퍼를 낸) 소프트웨어 개발에 뿐만이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일, 회사를 꾸려나가는 일, 비지니스 하는 일에서부터 육아나 인생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기제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무지에, 특히나 무지를 인지하는 방법이 부재하는 것에 대항하는 나의 quest를 적어보려고 한다. 역설적으로 무지를 인지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일단 든든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서 나의 무지는 나의 초능력이라고 이름을 지어보았다.
무지한 자의 뻔뻔함으로 나의 무지를 부끄럼도 없이 드러내고 이런 무지를 타개할 수 있는 조언과 도움과 공감을 구해보려고 한다. 주로 스타트업 비지니스와 제품 개발, user experience design에서 경험하고 느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모르는 게 천지빼까리니까 쓸 거리는 무궁무진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