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으로 은퇴했던 16세가 금메달리스트로 돌아왔다

퇴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밀라노 동계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알리사 리우 Alysa Liu.

올해 20세의 그녀는 실은 은퇴했던 선수였다.


13세에 챔피언, 16세에 은퇴

2019년, 13세에 미국 챔피언이 됐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였다.

미국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세 번이나 성공시켰다. 피겨 역사에서 극소수만 해낸 기술이었다.

근데 그녀는 스케이팅이 좋지 않았다.


"13살, 14살 때 매일 스케이팅했어요. 되게 비정상적인 어린 시절이었죠."

그녀는 그걸 일(job)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어릴 때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잖아요. 스케이팅은 책임감이나 짐처럼 느껴졌어요."

챔피언이었지만, 즐겁지 않았다.


아버지 아서 리우가 모든 걸 결정했다. 어디서 훈련할지, 누구한테 배울지, 어떻게 점프할지. 레이더 건까지 들고 와서 점프 속도를 재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그분의 사업이었어요. 제 거라고 할 수도 없었죠."


그래서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직후, 그녀는 은퇴를 선언했다. 16세였다.

아버지와 상의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건 제 인생이니까요."


처음으로 쉬어봤다

코로나 때 링크가 문을 닫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쉬어봤다.

"그게 제 인생 첫 휴식이었어요."


그리고 깨달았다.

"와, 스케이팅 안 하는 게 이런 거구나."

너무 좋았다고 한다.


은퇴 후 그녀는 평범한 10대로 살았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을 만나고, 콘서트도 가고 여유를 즐겼다.

"스케이팅을 계속했으면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시간을 절대 못 가졌을 거예요."


그 시간 동안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피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문제는 피겨가 아니었다. 피겨를 하는 방식이 문제였던 거다.

남이 정해준 음악, 남이 결정한 안무, 남이 통제하는 훈련, 남이 관리하는 식단.

그건 내 피겨가 아니었다.


복귀 조건

2024년, 18세가 된 그녀는 복귀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건을 걸었다:

프로그램 음악은 내가 고른다

안무 과정에 내가 참여한다

훈련량은 내가 조절한다. 너무 많으면 줄이고, 부족하면 늘린다

누구도 날 굶기지 못한다. 먹고 싶은 거 먹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전처럼 관여하지 않는다


천안문 시위로 중국에서 망명한 후 대리모를 통해 아이들을 낳아 혼자 키운 아버지. 수십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딸을 챔피언으로 만들었던 그에게 이 조건은 쉽지 않았을 거다.


"좋은 아버지예요. 다만 예전처럼 투자하시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조금 상처받았다고 했다.

"내가 너를 두 번의 전국 우승까지 이끌었는데..."

하지만 지지해주기로 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조건대로 스케이팅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금메달

그렇게 복귀한 그녀는 2025년 세계 선수권 우승, 2026년 밀라노 동계올림픽 금메달.

경기 중에도, 경기 후에도, 그녀는 즐기고 있었다. 카메라가 잡은 그녀의 표정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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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음에 드는 스타일, 자기가 고른 음악, 자기가 원한 안무.

그건 온전히 그녀의 피겨였다.


13세에 챔피언이 됐을 때는 일(job)처럼 느껴졌던 스케이팅이, 이제는 즐거움이 됐다.

황금도금된 새장(gilded cage)에서 벗어나 진짜 금메달(gold)을 얻었다는 댓글이 딱 맞는 표현이었다.


이게 퇴사와 똑같다

알리사 리우의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퇴사와 똑같구나.


번아웃으로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 그들도 일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그 방식이 싫은 거다.

남이 정해준 목표

남이 결정한 프로세스

남이 통제하는 내 시간

남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내 성과


그건 내 일이 아니다.

알리사 리우처럼, 챔피언이 될 수도 있다.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근데 즐겁지 않으면, 그건 일(job)일 뿐이다. 책임이고 짐이다.


그래서 떠난다. 번아웃으로, 퇴사로, 은퇴로.

그리고 어쩌면 깨닫는다. "아 나는 사실 이 일을 좋아했구나. 다만 그 방식이 문제였구나."


복귀 조건을 거는 것

알리사 리우가 복귀하면서 조건을 건 것처럼, 퇴사 후 다시 일을 시작할 때도 조건을 걸어야 한다.


나만의 조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가

누구와 일하고 싶은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가

무엇은 절대 타협 안 할 건가


이게 없으면 또 똑같은 곳으로 간다. 다른 회사, 같은 번아웃. 또다시 어느 정도 성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즐겁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삶.

own terms를 정하지 않으면, 또 남의 terms로 살게 된다.


Where am I부터 시작하기

근데 이 조건을 정하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리사 리우도 평범한 10대로 살면서 깨달았잖아. 자기가 피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자기를 망가뜨렸는지.


퇴사 후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해왔나 (Where am I)

뭘 좋아했고 뭘 싫어했나

어떤 순간이 좋았고 어떤 순간이 힘들었나

무엇이 나를 일(job)처럼 느끼게 만들었나


이걸 먼저 정리해야 나만의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다음이 "나는 어디로 가고 싶나", "어떻게 거기까지 갈까"다.


즐기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

알리사 리우가 증명한 건 이거다.

나만의 조건으로 해도, 아니 나만의 조건으로 해야,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의 통제 없이도, 코치의 굶주림 강요 없이도, 남의 기준 없이도.


아니, 그런 것들이 없어야 진짜 실력이 나온다.

13세에 챔피언 됐을 때는 일처럼 느껴졌던 스케이팅이, own terms로 돌아오니 즐거움이 됐다.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올랐다.

즐기면서 일하는 게 나태한 게 아니다. 즐기면서 일해야 지속 가능하다.

번아웃 없이, 나를 갉아먹지 않으면서, 오래 잘할 수 있다.


퇴사 프레임워크가 도와드리는 것

그래서 MePlan 퇴사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있다.

퇴사 후, 혹은 퇴사를 고민할 때, 알리사 리우가 했던 것처럼 자기 조건을 만들 수 있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 "나는 어디로 가고 싶나" → "어떻게 거기까지 갈까"

이 세 질문으로 차근차근 정리하다 보면, 나만의 own terms가 보인다.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 남의 방식이 아니라 내 방식.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나만의 조건으로.

챔피언이었지만 즐겁지 않았던 16세가, own terms로 돌아와 즐기면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퇴사 - 나를 지키며 잘 도망치는 법> 매거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이 재미있으시다면 저를 팔로우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