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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7. 2016

영화 '부산행' 후기

가부장의 희생으로 완성된 국가주의 재난영화

영화 <부산행>이 수작이라는데 동의한다. 좀비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잘 뽑아냈다. 드라마틱한 전개와 빠른 템포가 흥미진진하다. 재난영화 특유의 다양한 캐릭터나 극적 설정들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았다. 영화 <곡성>의 박춘배 같은 좀비가 수백 명 등장하지만 곡성에서처럼 느닷없게 느껴지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괴력을 기반으로 한 마동석 특유의 액션이 주는 말초적 쾌감도 짜릿했다.       


관객들은 무엇보다 이 영화의 사회비판적 시각에 공감할 것이다. 기차라는 공간이 주는 폐쇄적이고 계층적인 공간적 특성과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행태적 유사성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절반 이상을 담아낸다. 영화 <설국열차>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부산행>은 어딘가 모르게 비판하고자하는 대상을 명료하게 짚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의식도 다소 산만해 보였다.      

설국열차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한 몸에 가지고 있다. 설국열차의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먼저 배경을 보자. 같은 열차 같지만 <설국열차>와 <부산행>의 KTX는 다르다. 설국열차가 멈추지 않고 일정한 궤도를 도는 순환선인 반면, 부산행 KTX는 안전한 장소로의 빠른 이동을 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운행 중이다.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내재하지만 부산행의 KTX는 안전지대(부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심할 수 없는 지옥 그 자체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 승객들은 체제전복을 위해 다른 칸으로 이동하려 하지만 부산행의 KTX승객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설국열차의 지배자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기제들을 이용하여 억압을 정당화하지만 부산행 KTX에는 노골적인 살육과 저항, 배제와 차별이 만연하고 타자혐오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득할 뿐이다. <설국열차>가 국가 발전의 기형적 종착 단계를 보여준다면 <부산행>의 열차는 국가 이전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은유한다. 배경만 보면 설국열차보다 오히려 <부산행>의 KTX가 더 직설적이고 긴박한 위험 속에서 운행 중인 셈이다.    

부산행 KTX에 탑승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열차는 그 자체로 아비규환의 전쟁터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이 죽어야 할 때도 있다.   


   

이렇듯 좁은 공간 안에서 좀비와 대결구도를 이루는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반면 좀비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력의 존재들이다.(영화 속에서 좀비는 현실을 반영하는 지독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따라서 대화나 공감이나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피를 빨아 동족의 숫자를 늘리는 ‘지도체제 없는 무리’다 보니 좀비에 대처하는 방법은 방어적 폭력 아니면 도피가 전부다. 이렇게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제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람과 좀비의 대결구도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제법 균형을 이루던 대결구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소수의 생존투쟁으로 변한다. 좀비에 의해 희생되어가는 승객들은 무책임하게 방치되고 무기력한 최후를 맞는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 안에서 불확실한 정보에 순응하며 단지 ‘생존’을 희구할 뿐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배제한다. 남을 밀어내지 않으면 나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점 좀비를 닮아간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잔인한 은유가 있을까.      


언제나 그랬듯, 비극의 시작은 탐욕이다. 펀드매니저 석우가 투자한 바이오 기업에서 실험 중 유출된 바이러스에 의해 대규모 감염사태가 벌어진다는 설정은 미군의 화학폐기물에 의해 탄생한 변종 괴물을 그린 봉준호의 <괴물>과 맥을 같이 한다.      


바이러스나 괴물로 인한 대형 재난에 국가의 대처는 기만적이고 미온적이다. 결국 사태의 해결은 개인이나 가족 차원의 문제로 축소된다.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가정은 해체와 결속을 반복한다.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가부장들이다. 환난 속에서 가정과 아이를 지켜야 하는 아버지로써의 의무감은 <괴물>의 강두나 <부산행>의 석우나 다르지 않다. 왜 우리의 재난 영화에는 항상 국가라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까. 왜 국가의 부재는 항상 가부장의 희생으로 이어지는가.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좋다. IMF때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영화 <부산행>의 실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 영화는 가부장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배려가 있어 소시민들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계몽한다. 노인, 임산부, 아동, 노숙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하나같이 의존적이다. 그들은 항상 안전한 장소에서 구조를 기다리거나 (건장한) 남성들에게 SOS를 보내고 개인적 감상에 휩싸여 화를 자초한다. 반면 남성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한데다가 위급 상황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 석우나 상화 뿐 아니라 심지어 의존적이었던 노숙인조차 임산부와 아이의 생환을 위해 자기의 삶을 기꺼이 던진다. 끝까지 비열한 모습을 버리지 못했던 김상무(김의성)는 또 어떤가.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의 이기적 행태를 모두 ‘혼자 사는 어머니’를 위한 가장으로서의 생존투쟁이었다고 변명한다. 영화는 이렇게 가부장의 극적 희생을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서 사회보호의 책임이 남성인 가부장에게 있다는 국가주의적 판타지를 옹호하고 있다.      

죽음 앞에 오열하는 김상무의 변명을 듣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국가가 부재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개인을 지키는 유일한 힘은 그저 남성의 우월한 신체능력일 뿐이라고 말하는 영화의 화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들의 희생만이 국가의 부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웅변하고 가부장들의 숭고한 희생을 미화하면서 동시에 사회비판적 영화라고 주장하는 건 넌센스다. 만약 우리 사회가 가부장의 ‘내 식구 챙기기’에 의존해야만 존속이 가능한 구조라면 가뜩이나 개별화 파편화된 사회문제들은 더더욱 개인과 가정의 범주 안에 고립되고 심화되지 않을까. 남성의 힘에 기반한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는 더 공고화되지 않을까. 영화 속 소극적이고 나약한 이미지의 여성 캐릭터의 문제라기보다 남성중심의 계몽주의적 시각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에서는 양국 국가대표 선수로 나오는 남주(배두나)가 괴물의 아가리에 불붙인 화살을 꽂아 넣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괴물>과 <설국열차>에 모두 출연한 고아성은 괴물로부터 끝까지 남동생을 지켜내는 강인한 형제애와 궤도열차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미래로써의 동양여성의 저력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산행>에 나오는 여성들은 어떤가. 남성들의 보호와 희생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국가라는 또 다른 가부장의 품으로 생환했을 뿐이다.  이쯤해서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 좀비의 확산을 방치하고 왜곡했던 국가는 어디로 숨었는가. 가부장들의 희생이 살린 것은 여성과 아이였을까 아니면 국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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