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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Oct 23. 2016

길이 있는 곳에 생각이 머물다

2박3일 교토 여행기   

일본은 가고 싶은 나라 리스트에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과거사에 대한 앙금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일본 제품은 절대 구입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단호함이 애국이었던 시절의 한 복판에서 역사 교과서를 배웠다. 이래저래 나에게 매력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토 여행을 하게 되었다. 여러 이유로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탓에 남은 연가일수가 아깝게 느껴지던 차였다. 내게 제안을 했던 분이 워낙 식견이 넓고 여행경험이 많은 분이어서 순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가을 교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전체 일정은 고작 2박3일 이었지만 첫날 아침 여덟시 반에 출발하여 마지막날 저녁 여덟시 반에 돌아오는 일정이라 꽉찬 3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포에서 오사카 간사이 공항까지는 한시간 반에 불과하고 간사이에서 교토역까지 특급열차를 이용하면 사실 서울에서 교토까지 네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평소에도 골목을 자주 찾는 편이다. 직장이 서울 시내라서 점심시간에도 인사동과 북촌일대를 돌고 남산 둘레길 산책을 한다. 한시간도 안되는 일탈이지만 그 잠시간의 여유가 나에겐 무척 소중하다. 하루치 영양제를 챙기듯 산책도 그렇게 챙기는 편이다. 교토에서의 2박3일 일정도 산책의 연속이었다. 물론 시내버스를 기반으로 관광지를 도는 식이었지만 멀지 않은 거리면 꼭 걸어서 이동하려 했다. 걷는 내내 낮선 거리를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교토는 우리로 따지면 경주같은 도시다. 전체 면적도 넓지 않고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일본과 우리를 비교한 글을 읽으면 어김없이 그들의 깔끔한 성품과 질서정연한 모습에 대한 찬사가 나왔다. 그럴때마다  '사람사는 곳이 설마 그럴까' 반감이 들기도 했었는데 눈으로 확인한 교토는 그들의 느낌이 어김없는 사실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시내 버스안에서 수학여행을 온 초등학생 무리를 보았다. 빨간 모자를 쓰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게 유니폼이라는 건 무척 중요한 의식의 일부로 느껴졌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테마파크 같다고 할까. 학생은 교복을, 운전기사는 하얀 셔츠에 정모를, 전기기술자들은 경찰보다 더 단정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다못해 관광지 주변의 가게에서도 나름대로 복장을 맞춰입은 점원들이 친절한 말투로 손님을 맞아주었다. 공항에서 교토로 이동하는 열차 내에서 본 농촌풍경도 이색적이었다. 모든 경작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정확하게 구획되어 있었고 열차 주변에 자리한 가정집 베란다에는 줄을 맞춰 널어놓은 빨래들이 너무나 정결하게 느껴졌다.

 

은각사 정원의 모습이다. 은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시절 어떤 쇼군의 별장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사찰로 바뀌었다.


어느 나라나 관광지 주변은 관광객과 상인들로 번잡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관광지 역시 혼잡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전통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오랜 목조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과 일본어 간판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교토는 일본인들에게도 휴식의 도시라고 한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옛 정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천년 고도에서 사색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본의 문화적 역량이 느껴졌다.  


특별히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철학의 길'이다. '철학의 길'은 은각사에서 난젠지를 잇는 1.5km정도의 샛길인데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좁은 샛길 가로 오래된 주택과 상점이 즐비하게 이어진다. '철학의 길'은 교토의 철학자였던 니시다 키타로가 이 길을 오가면서 사색을 하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년의 칸트가 산책을 해서 유명해졌다는 하이델 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을 본떠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동행자의 설명을 듣고보니 걷는다는 행위와 생각한다는 행위가 '길'이라는 실체적 현상위에 구현되는 '구도'의 행위라는 점에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걷는다는 행위는 온몸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아닐까.

교토 시내에서 기모노 차림의 여성을 보는 건 무척 흔한 일이다. 궁궐 주변에 한복차림의 젊은이들을 볼 수 있는 서울과 달리 이들에게 기모노는 생활의 일부인 것 처럼 보였다.
수로 한켠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 수로에 물고기가 많아서 사냥을 위한 기다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고요한 순간, 모든 세상이 멈추어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교토관광지 주변엔 인력거가 많다. 두시간에 이십여만원의 비용이 든다. 이번 여행중 찍은 사진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인도와 차도로 교행하는 여인과 인력거꾼.

후시미이나리다이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다. 이 곳은 후시미 지역에 있는 이나리 신사의 본가이며 농사의 신이자 장사의 신으로 불려지는 이나리신을 모시는 신사다. 곳곳에 이나리를 상징하는 여우상이 보였다. 후시미이나리다이샤에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의 배경이 된 도리이터널이 유명하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 중 한 장면

도리이는 장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신사에 돈을 내고 세우는 문인데 크고 작은 도리이가 수천개 늘어서 장관을 이룬다. 워낙 관광객이 많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았다. 수은을 구워 낸 안료로 칠을 하여 짙은 주황색이 강렬한 시각적 쾌감을 준다.

도리이의 뒷면을 보면 언제 누가 이 도리이를 세웠는지가 적혀있다. 하나를 세우는데 수천만원에서 최하 몇십만원은 내야 한다고 한다. 도리이는 '새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교토 기념품 가게에서 자주 보는 고양이 인형이 거리에서도 보인다. 에도시대 어느 사찰의 고양이가 손을 흔들어 객을 불러들여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낸 일화때문에 유명해졌다나.

일본은 관광상품을 개발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 같았다. 별것 신화나 일화,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스토리들을 상품화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농사의 신 도리이를 '장사의 신'으로 바꾸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전후 경제부흥의 시대에 어떤 기업가가 이 곳에 도리이 하나 세우지 않았겠는가.

서민용 도리이. 28만원이란다. 작은 가게하는 상인들이 세우겠지. 서 있지 않고 누워있는 걸 보면 자리가 없어서 대기중이거나 기한이 지나 폐기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교토에서 본 모든 것을 한개의 포스팅으로 적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다 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써봐야 읽을리 없다. 그래서 몇가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장소로 추려 포스팅하려 마음을 먹었지만 몇가지로 추리는 것이 또 쉽지 않다. 그래서 딱 네가지만 선별하여 적기로 한다. 다른 것들을 버려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다. 할수 없지 뭐.


세번째로 언급하는 장소가 교토의 기온거리다. 기온거리는 보통의 관광지들이 문을 닫는 5시 전후하여 교토에 체류중인 모든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거리다. 관광지들이 일제히 문을 닫으니 한 시간이 소중한 관광객들이 숙소에만 머물리 없다. 모두가 쏟아져 나온 기온 거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장관이었다. 하천변으로 늘어선 고급 주점들이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거리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게다가 게이샤를 불러 유흥을 즐길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돈이 넘치는 사람들 이야기지만.


일단 화려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만큼 복잡하기도 하지만 역사만큼의 전통이 좁은 골목길 전체에서 느껴졌다. 서울에도 전통있는 거리들이 몇군데 남아 있지만 이렇게 상업성을 겸비하면서도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거리는 흔치 않다.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피맛골이 한 순간 빌딩숲속에서 사라지는 걸 직접 목격한 입장에서 새로 뜨는 가로수길이니 경리단길이 이곳 기온거리처럼 와 닿지 않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골목은 도시의 주름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궤적이다. 세월이 갈수록 진해지고 깊어지지만 그 깊이와 향을 대체 할수 있는 건 없다. 요즘의 기술로 억지로 만들어 낸 새삼스런 복고취향이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전통은 종적의미에서 시간과 횡적의미에서 공유하는 삶의 총합 같은거다. 사람들에게 골목은 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삶의 연속성과 동시대인의 필요가 동시에 구현되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골목은 보행자에게 자극과 경험의 연속이다. 똑같은 간격마다 일률적인 공간으로 구획된 신도시의 거리에서 시각적 재미를 찾을 수 없는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공간에 익숙해져버렸다. 주말이면 전통가옥이 아직 남아있는 북촌이나 서촌의 골목들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안고 있는 누적된 시간과 공간의 경험들을 우리도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울에서 굳이 이와 비슷한 장소를 찾으라면 북촌을 꼽을 수 있겠지만  북촌주변에 요즘 들어서는 이국적 카페들을 생각하면 많이 다르다.  이 사진은 청수사 입구다.   



교토는 시인 윤동주가 유학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교토에 와서 동주의 시비를 보지 않고 갈 수 없었다. 두번째 날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도시샤 대학 교정으로 향했다.


도시샤 대학은 간사이 대학, 간세이가쿠인 대학, 리츠메이칸 대학과 함께 관서의 4대 사학으로 불릴 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사학이다. 지하철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대학에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이 유학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은 말도 못하게 깨끗하고 고요했다. 주변에 우리 대학들 같이 카페 하나 찾아볼수 없었다. 학생들은 검소했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일본의 저력은 대학이었다
정지용 시비 앞에는 그의 시집 <향수>가 놓여 있었다. 미운 감정 한편으로 한국에서 유명한 시인들의 시비를 그대로 보존하는 대학측의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윤동주의 시비에는 태극기와 참이슬 소주 한병이 놓여있었다.

정지용은 문학부 영문학과에 1923년부터 6년간 수학했고, 윤동주는 1942년 영문과에 편입하여 1943년 체포되기 전까지 수학했다고 한다. 식민지의 아들로, 시대의 지식인으로 당시 동주와 지용은 얼마나 사무치는 마음으로 이 공간을 견뎌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침 고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읽으며 마음이 심란해져 교정 한켠에 앉아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사방이 감시의 눈초리였을테고 동급생 모두가 일본인이었을텐데 동주는 그 험한 세월을 홀로 어떻게 견뎌냈을까.


교토에서의 2박3일은 짧지만 오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전체 일정을 내 두 다리로 소화했기 때문일까.


여행을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이있는 곳에 사람들의 생각이 머문다. 머물다 걷고 걷다 머무는 곳. 그곳이 골목이든 큰 길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빠르고 정확한 이동수단의 발명이 인간의 삶을 더 넓게 확장하였다지만 걷는다는 건 그에 앞서 사람들의 삶을 확장하는데 기여한 가장 원초적인 행위 아닐까. 생각하며 걷는다는 행위의 소중함을 이번 여행을 통해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여행은 끝났지만 길은 여전히 내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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