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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03. 2018

행성 F 탈출기

페이스북에서 돌아온 남자



얼마쯤 왔을까.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달력을 보니 2011년 봄이었고, 어쨌거나 꽤나 먼 거리를 달려 왔다고 생각했다. 마흔살 언저리였고, 바닥을 긁어내 녹색 조류가 진득하게 번져버린 강물 위로 곱게 한복을 입은 여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였고, 나이 먹을만큼 먹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심드렁해져 있었고,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낯선 곳 어디쯤엔가 여덟개의 다리를 뻗고 숨 돌릴 곳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막연한 기분이었다. 무얼 해보겠다는 의지라던가 무얼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 따윈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사면을 둘러싼 침묵과 암흑의 괴괴하고 음산한 기운 탓에 그저 불빛 하나에만 의존해 걸었을 뿐이다.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겨우, 가까스로, 극적으로, 그 곳에 당도했다.

처음엔 혼자인 것 같았다. 알고보니 알만한 사람 두서넛이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평소같으면 하지도 않았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들 역시 처음엔 혼자였다고 했다. 낯선 환경에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알만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주었고, 그 알만한 사람이 친구라고 소개해 준 또 다른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객쩍은 인사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렇게 다들 어영부영 친구가 되었다나. 친구라고?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

놀라웠다. 티비 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이 매끈한 생명체가, 사람인지 인형인지 혹은 동물인지 식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유기체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 그들이 내뿜는 말풍선엔 색색의 물감들이 덧칠해졌다. 덩달아 풍선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내 입에서는 말풍선이 생성되지 않는걸까. 고민이 깊어지던 찰라, 풍선위로 깨알같은 글씨가 새겨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생각이 있으면 여기까지 왔겠니. 반문하고 싶었지만 남들 하는대로 헉헉. 거친 숨소리를 몰아 쉴수밖에.

처음엔 그저 몇마디 암호같은 말을 뱉어 보았다.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원래 처음 오면 그런거야. 알만한 사람 하나가 그렇게 일러줬다. 처음 온 생명에게 불편한 느낌은 지구와 다르지 않구나. 지구도 내겐 불편했거든. 어디나 처음은 불편하지만 곧 익숙해지게 돼. 익숙해진다는 건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주고 받으며 서로 비슷해진다는 이야기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열을 가리고, 차별하고, 평가하고, 그러다 제 풀에 죽는 곳. 내가 사는 곳이야.

어디 이야기지?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한 걸. 


살던 곳이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을텐데.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오래 달려왔는데.


아냐. 보라구. 여긴 지친 영혼들이 만들어낸 가상 공간이고 넌 그저 제자리에서 접속해 있을 뿐이라고. 


아.. 말도 안돼

생명인지, 혹은 진화가 덜된 유기체인지 알수 없었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지만, 말풍선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뽑아내던 녀석이 먼저온 티를 내며 주절거렸다.

가상이든 접속이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행성 F에선 말풍선의 빛과 질이 존재의 격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가상이어도 좋았다. 말풍선 꾸미기에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무지개색으로 곱게 부풀려진 말풍선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운 색깔이 덧칠해진 말풍선을 내뱉다 보면 내 몸에도 고운 빛깔이 물 들것 같은 기분이었다. 행성과 행성을 오가는 열차안에서, 화장실에서, 침대 위에서 나는 틈나는 대로 말풍선을 힘껏 부풀렸다.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행성 F는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시간 날때마다 접속을 했겠는가. 발을 딛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행성은 가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생명체들은 친절하게 인사했고, 호감을 표했고, 꽃과 케잌을 나누기도 했고,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간혹 울분을 토하거나 뒷담화를 하는 이도 있었으나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참. 편리한 걸.

편리한 관계속에서 나는 평화로운 일상을 즐겼다. 행성은 이따금씩 지난 날들을 보여주기도 했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행성엔 정말 다양한 생명체들이 부유했다. 그룹을 지어 몰려다니는 생명체들은 막무가내로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고 헐벗은 생명체들이 무례한 메시지를 보내올 때도 있었지만 차단하면 그만이었다. 수 많은 생명체를 차단했다. 흡사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행성에 접속해있는 동안 달은 이천육백번 기울었고 그만큼 해도 떠올랐다가 저물었다. 문득, 아득하게 2011년 봄길을 차박차박 걸어가던 예전의 내 모습이 스쳐갔다. 마침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나는 종일 행성을 오가며 밀린 드라마에 심취해 있었다. 여주인공은 작게 오므린 입술로 남주인공에게 화이팅이라고 외쳤다. 다들 견뎌내는구나.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되뇌며 견디고 있었다. ‘아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수 있다네’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구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대체 무엇을 찾아 이 곳에 왔던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뛰었다. 2011년의 속도만큼 전력질주. 암흑과 침묵이 커튼처럼 드리워진 공간을 건너 다시 뛰고 또 뛰었다. 말풍선이 만들어낸 무지개빛 화면들이 역순으로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2천6백일을 거슬러 그렇게 다시 이 곳에 도착했다. 익숙한 곳. 익숙했던 곳. 익숙해서 질려버렸던 곳. 그 곳에 내가 있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행성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의 메시지로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돌아온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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